2009년 5월 14일 목요일

[노잉] 세상을 향해 던지는 마지막 경고.


노잉을 뒤늦게야 봤다. 이처럼 재미있고 흥미로운 영화에 대해서 왜 그렇게 말들이 많은지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들이 있었다. 노잉을 추천하는 사람들은 해프닝을 재미있게 보았다면 분명 이영화 역시 그 이상일 것이란 말을 아끼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해프닝만큼이나 긴장감과 스릴을 느끼면서 볼 수 있는 역작이라고 생각한다.


# 노잉은 단순한 재난 / 재앙영화가 아니다.

일단 노잉의 홍보 포스터에 표기된 문구부터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대부분 이 영화를 기존의 재앙이나 재난 영화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영화의 피상적인 부분만을 이해한 편협함에서 비롯된다.


노잉의 세계관은 신의 존재 여부, 좀 더 확장하면, 창조론과 진화론, 기독교적 종말론과 지적설계론을 아우르는 정신에서 시작된다. 지구상에 존재했던 수 많은 재앙들이 이미 예견된 것이었고, 이것은 단순히 초자연적이거나 우연에 기인한 현상들이 아니며, 철저하게 결정되어 있는 운명적인 미래일 뿐이라는 것이 영화 전반에 깃들어 있는 모체다.



영화 <지구가 멈추는 날>에서처럼 지구를 구하기 위해 인류 문명을 파멸시키고자 하는 메신저(외계생명)의 계획들 처럼 영화 노잉에서의 인류멸망(리셋) 역시 시차를 주고 꾸준한 경고의 메세지를 보낸다. 기독교적 세계관과 흡사한 부분이 있지만 주체가 신이 아니라 오랫동안 지구를 지켜보고 꾸준히 경고의 메세지를 보내 왔던 메신져(외계생명)라는 점에서 차별점을 가진다.


지구 멸망이 진행되고, 마지막으로 간택 당한 순수한 사람들은 새로운 정착지로 인도되고 인류를 창조한 어떤 초자연적인 힘에 의해 다시 인간본연의 원시상태로 되돌려진다. 이는 감독 스스로가 자신에게 꾸준히 되묻는 여러 가지 세계관의 질문들일 수 있다. 영화의 큰 중심이 되고 있는 존 코스틀러의 주변이야기들을 통해서 꾸준히 이야기 된다. 존은 MIT 교수로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지만 기독교적 세계간을 부정한다.


목사인 아버지와 사이도 좋지 않으며, ‘기도해준다’는 동생의 말에도 ‘하지 말라’는 거부감을 표시하기도 한다. 물론 이는 호텔 화재로 아내를 잃은 슬픔에서 비롯된 시니컬한 태도일 수 있지만 알렉스프로야스가 궁극적으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세계관의 본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부분이다. 어떻게 보면 기독교적인 가치나 믿음에 완전히 배반하는 것이어서 미국 영화 평론에서 그처럼 혹독한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 아닐까.


감독 스스로가 세상에 던지는 경고처럼 보였다. 우리가 그처럼 믿고 따르는 종교적인 신념이나 영생을 위한 기도가 실체를 뜯어보면 인간의 이기심에 면죄부를 주려는 또 다른 오만 정도일 것이라는 메세지 영화내내 지울 수 없었다. 그래서 인류 앞에 펼쳐진 수많은 재난과 재앙이 단순히 초자연적인 우연한 사고가 아니라 이를 경고하고 바로잡으려는 최소한의 메세지처럼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는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는 동시에 경고를 이해하지 못한 어리석음에 대한 결과처럼 느껴진다.


누가 복음 17장 26-35절

  1. 시대에 일이 벌어진 것과 같이, 인자의 날에도 그러할 것이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 가고 시집 가고 하였는데, 마침내 홍수가 나서,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2. 롯 시대에도 그와 같은 일이 벌어졌다.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나무를 심고 집을 짓고 하였는데,
  3. 롯이 소돔에서 떠나던 날에,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쏟아져 내려서,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4.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그러할 것이다.
  5. 그 날에 지붕 위에 있는 사람은, 자기 물건들이 집 안에 있더라도, 그것들을 꺼내려고 내려가지 말아라. 또한 들에 있는 사람도 집으로 돌아가지 말아라.
  6.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
  7.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목숨을 잃는 사람은 보존할 것이다.
  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잠자리에 누워 있을 터이나, 하나는 데려가고, 다른 하나는 버려 둘 것이다.
  9. 또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을 터이나, 하나는 데려가고, 다른 하나는 버려 둘 것이다."

<출처 : http://www.holybible.or.kr>


# 재앙의 순간에 나를 던지는 스릴이 두배가 되는 영화 노잉

인류에 대한 경고 안에 내던져진 죤에 감정이입하면 영화는 두 배의 스릴을 가져다 준다. 아비규환의 항공기 추락사고 현장, 귀가 찢어질 듯한 참혹한 지하철 사고의 주변, 죤의 옆에 내가 있다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 영화는 끔직하고, 놀라운 체험을 가져다 준다. 한층 정교하고 사실감 있는 CG는 마치 내가 현장에 있는 긴장과 스릴 사이를 오가게 만든다.



어떻게든 예정된 재앙을 막아보려는 인간의 의지가 되돌일 수 없는 한낱 시도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는 순간은 왠지 허탈감마저 밀려온다. 전 인류를 궁지로 내모는 최악의 순간에서도 약탈과 방화를 일삼는 인간의 무모함과 어리석음이 불바다와 겹쳐지면서 인류 재편(리셋)의 정당성에 상당한 설득력을 부여하고 있다.


스케일을 떠나서 실마리를 풀어나가는 사건 전개와 실체에 대한 진실들의 규명은 충분히 설득력을 가지고 긴장감을 유발한다. 앞서 이야기 한 것처럼 해프닝의 경우처럼 결말이 생뚱 맞거나 이해 가지 않는 관객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상상력, 그리고 그것에 기반한 인류 전체에 보내는 경고 메시지를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로운 영화임에 틀림없다.


댓글 3개:

  1. trackback from: 노잉 (Knowing, 2009)
    * 스포일러 있어요. 직설적인 공포 재난보고서 얼핏 보면 그저 평범한 재난영화 같다. <노잉>에 대한 첫 인상은 우습게도 이랬다. 흡사 재난이라는 이름을 뒤집어쓰고 시청각적 폭력으로 관객을 인도하는 것 같은 이 모습은 대체 무어란 말인가. 물론 이 말이 틀린 말은 아니다. <노잉>은 분명 재난 영화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 보니 어떤가. 영화라기보다는 하나의 보고서에 가깝다. 그것도 절로 섬뜩해지는 온갖 숫자들의 나열이 스크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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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맞트랙백 걸러 왔다가 이렇게 좋은 글을 보게 되어 기쁩니다.

    재난영화로 치부되는 건 워낙 영화 속 재난의 강도가 세서 그런 게 아닐까 싶지요.^^ 물론 단순 재난영화쯤으로 치부하는 건 좀 위험한 발상입니다만.

    잘 읽었습니다 :-) 트랙백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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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진사야 - 2009/05/14 19:35
    안녕하세요. 진사야님. 재난의 순간에 가장 실감나는 부분이 바로 비행기 추락 후에 아비규환이 아니었나 생각이드네요. 보기에 따라서 생각해볼 몇가지 꺼리를 던져주는 영화인 것 같아요. 트랙백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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