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5월 15일 금요일

[김씨 표류기] 도시에 표류하는 외로운 영혼들.


자살을 거꾸로 하면 아이러니하게도 '살자'가 아니던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것이 해방을 의미하고, 해방이 곧 구원인 사내. 그야말로 팍팍한 인생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채 빚에 쫒기고, 애인은 변심하고, 구조조정으로 거리에 내몰린 상황. 희망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다. 막장 삶을 편안히 마감하려고 한강다리 밑으로 뛰어내렸건만 정신을 차려보니 이게 왠일 밤섬이더라.


63 빌딩에서 간단히 몸을 날리는 편이 나았다라고 후회해봐도 소용이 없고, 넥타이에 목을 메달아 생을 마감하려니 살 떨리는 순간에 왠 설사냐. 생리현상 앞에서는 자살이고 뭐고, 일단 벨트부터 풀 수 밖에.

큰 볼일 중(?)에 눈 앞에 펼쳐진 사루비아는 참으로 달콤하기만하다. 이렇게 달콤함을 느껴본 적이 언제였던가를 떠올리니 아득하기만 하다. 뭔가 깨달음이라도 얻은 뒤 돌아가야할 곳을 포기한 인간 김씨의 밤섬 표류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캐스트어웨이의 톰행크스처럼 '밤섬'이라는 좁은 섬에 갇힌 한 사내의 좌충우돌 이야기를 기대하고 극장을 찾은 사람이라면, 조금 의외의 영화를 만날 수 있다. 아니 그 이상의 의미는 건질 수 있는 영화다. 그만큼 특별하다.


영화의 주요 공간은 김씨가 활약하는 작은 밤섬과 싸이질이 유일한 낙인 짜가신상녀의 어지러운 방이다.  특별할 것 없이 반복되는 무기력함이 공존하는 두 공간은 어찌보면 정처없이 표류하는 현대인의 일상적 삶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축소판 같다. 아둥바둥 뒤돌아 볼 겨를 없이 살아온 사람들이나, 인터넷 너머의 공간에 철저하게 이중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단면을 옮겨 놓은 듯하다. 그 안에 고립되고 단절되었지만 희망을 이야기하고, 진화하는 인간의 무한함, 의지와 끈기, 불굴의 몸부림을 웃음으로 풀어내는 재능이 참으로 돋보인다.

한마디로 마음편하게 그리고 속시원하게 웃을 수 있는 영화다. 엉뚱해서 유쾌하고 상상이상의 즐거움이 그득하다. 그렇다고 웃고만 있기에는 너무도 가슴 찡한 시퀀스가 몇몇 보인다. 김씨표류기의 '김씨'에게서 아는 사람의 '동치성'과 '똑바로 살자'의 정도만이 겹쳐서 떠오르기도 한다. 정말이지 정재영이 뿜어내는 웃음과 슬픔을 동시에 몰입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운 영화다.

정재영은 그렇다치더라도 정려원이야말로 새로운 발견이다. 제대로 배우가 된 듯한 모습이다.  문명 속에 고립된 외로움, 치유되지 않은 과거에 대한 두려움, 쳇바퀴처럼 반복된 무기력함에 갇혀 사는 캐릭터를 잘 소화해냈다.


현실 공간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늘 피해의식에 갇혀 사는 신상녀로서의 삶은 측은하기까지 하다. 단순히 김씨표류기가 캐스트어웨이의 오마주 수준에 머무르지 않는 것은 두가지 고독과 외로움을 링크처럼 연결하고, 치유하는 과정을 담아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현실 속에 자아와 만나는 방법, 희망을 체득하는 과정이 잔잔하다. 고립과 단절을 넘어, 디지털 차가운 텍스트의 한계를 뛰어 넘는 아날로그적 감성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이다.

여유를 갖지 못하고 한동안 웃어본 적이 없었던 사람, 내 삶 속에 편견과 오만을 버리고 싶은 사람, 희망이라는 비타민이 필요한 사람에게 꼭 추천해 주고 싶은 영화가 바로 김씨 표류기다.

1. 올해 본 영화 중 최고.

2. 영화를 보고 나서 가장 먹고 싶은 음식 짜파게티와 자장면.

3. 캐스트 어웨이가 페덱스 윌슨배구공을 PPL 했다면 김씨표류기는 오뚜기 케찹, 소니카메라, K2 배낭, HJC 헬멧 정도를 PPL하지 않았을까.... 머니머니 해도 짜파게티는 압권.

4. 영화 보고 자장면을 먹어주는 센스도 필요하겠다. 그것이 자장면에 대한 그 동안의 오만과 편견에 대한 반성이 될테니.... :)



댓글 16개:

  1. trackback from: 비트손의 생각
    [김씨 표류기] 도시에 표류하는 외로운 영혼들. 이 영화 강추합니다. 웃다가 울컥해지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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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비밀 댓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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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Anonymous - 2009/05/15 16:52
    안녕하세요. 실으셔도 되구요. 제 이름은 손병구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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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영화 재밌었습니다.

    이 영화 개인적으로도 인연이 있는데 제가 있는 동호회에서 달사진을 협찬해주었거든요. ㅎㅎㅎ

    리뷰 잘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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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지돌스타 - 2009/05/15 17:08
    안녕하세요. 어떤 동호회인가요? 사진 동호회인가요? 달사진이 정말 많이 나오던데 영화보는 느낌이 남다르셨을 것 같네요. ^^ 댓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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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비트손 - 2009/05/15 17:50
    천문노트(http://astronote.org) 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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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지돌스타 - 2009/05/15 17:08
    그렇군요 아마도 동호회분들은 영화가 남달랐을 것 같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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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trackback from: 김씨 표류기 _ 그들은 과연 괜찮아졌을까?
    김씨 표류기 그들은 과연 괜찮아졌을까? 사실 장진+정재영 조합에 어느 정도 지쳐있기도 했고, 완전 코미디인 것만 같은 홍보방향에 안봐도 될 것 같다고 생각하고 크게 계획에 없던 영화였는데, 시사회를 통해 들려오는 지인들의 소문은(이 '지인'가운데는 저만 일방적으로 알고 있는 이들도 존재합니다 -_-;;) '괜찮은' 영화다가 지배적이어서 내심 속으로, 역시 <천하장사 마돈나>를 이해영 감독과 함께 쓰고 연출했던 이해준 감독이 재능이 어디가진 않았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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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저도 감히 올해본 영화중에 최고라고 말하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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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trackback from: [리뷰] 김씨표류기 (Castaway on the Moon, 2009)
    "천하장사 마돈나" 이해준 감독의 신작 "김씨표류기"는 오늘날의 이 사회를 살아가는 이들을 위한 한 편의 우화입니다. 1000만이 넘는 인구가 사는 서울에서 무인도라니, 너무도 우화적 공간임에 틀림이 없어 보입니다. 영화는 결국 이 시대의 소통과 고립, 외로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남자 김씨(정재영 분)는 신용불량자로 자살을 결심하고 한강에 뛰어들지만 밤섬에 고립(!)되고 맙니다. 구조를 요청하려고 119, 전 여자친구에게 마지막 남은 배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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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강자이너 - 2009/05/19 12:21
    전 사실 이 영화 흥행할 줄 알았는데 좀 더디네요. 아직 입소문 중이라서 그럴까요? 한번 끝까지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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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trackback from: 김씨 표류기, 아주 간단한 리뷰.
    시간이 없으니까 아주 짧게 리뷰하고 넘어갑니다. 자세한 리뷰는 오늘 오후에 올리도록 할게요. 이 영화의 공신 - 이해준 감독의 아주 적절한 두 '김 씨' 이야기의 배치. 역시 「천하장사 마돈나」의 감독답다. - 정재영의 노숙자 (?) 겸 표류자 연기는 무서울 정도로 감정에 이입하게 만들었다. 이 배우가 정말로 「강철중:공공의 적1-1」과 「신기전」에서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를 했던 정재영인가 싶었다. - 엑스트라도 최대한 절제하고 최대한 두 '김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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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이 영화 관련 리뷰 중에 제 느낌이랑 제일 비슷한 것 같아서 급반가움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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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trackback from: 김씨 표류기 (2009)
    소위 '생각없이 웃으면서 보면 되는 영화'라고 명명하는 비공식 장르가 있다. 오늘 본 이 영화, 바로 그런 범주에 속하는 영화 되시겠다.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이 고민없이 살면 보는 사람 역시 따로 고민하지 않아도 된달까, 영화 속의 두 김씨는 그 나름의 고민을 갖고 있지만 그거야 그냥 영화 속 설정을 꾸미기 위한 얇은 장치에 불과해 보인다. 액션 영화에 단골로 등장하는 부모의 원수, 사부님의 원수 따위의 '뭐라도 좀 얘깃거리는 있어야 될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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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trackback from: 김씨 표류기
    인간은 어떠한 환경속에서도 살아가게 되어 있단걸 알게 되었다. 웃지만 눈물이 펑펑나는 그런 영화. 정재영이니깐 가능한 영화. 희망을 먹을 수 있는 가슴 따뜻한 영화. 모두에게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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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trackback from: 버려진 자의 깨달음... 김씨표류기 (스포일러 있음)
    | 버려지다.. 혹은 버리다. 영화 '트레인스포팅'의 도입부가 떠오른다. "삶은 곧 선택이다. 학교를 선택하고, 직장을 선택하고, TV/냉장고를 선택하고..." 선택에는 돈이 필요하다. 돈 없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그리고 돈이 많을수록 선택의 폭은 넓어진다. 반면 돈이 적을수록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좁다. 냉정한 사회는 선택의 폭이 좁은 '돈 없는 자들'을 냉대한다. 돈 없는 자들은 쉽게 버려진다. 남자 김씨는 버림받았다. 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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