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5월 27일 수요일

[보이 A] 오해와 편견이라는 사회적 폭력의 무서움.


보이 A는 폭력에 대한 영화다. 몸에 피멍이 들고, 살이 찢겨 나가게 만드는 물리적인 폭력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힘으로 서서히 인간을 파멸에 이르게 하는 잔인함에 대한 기록이다.

영화는 10세의 어린나이에 친구와 함께 우발적으로 끔찍한 살인을 저지른 범죄자가 14년의 교정기간을 거쳐 사회로 돌아왔을 때 내 주변에 그를 들여 놓을 수 있을 것인가라는 작은 물음으로 시작한다. 물론 씻을 수 없는 과거에 대한 후회와 반성, 속죄의 마음들. 어두운 과거를 딛고 새 삶을 살아가기 위한 한 젊은이의 노력과 꿈을 장시간 풀어 놓는다.


잊고 싶은 기억, 씻고 싶은 과거의 굴레를 벗어던지기 위해 에릭은 잭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고 새출발한다.  마음 한구석 불안한 심리를 대변하듯 악몽에 시달리는 날들이 이어지지만 보호 감찰사 테리의 도움으로 새로운 직장과 친구, 애인까지 생기게 되면서 잭의 일상은 평탄하게 흘러간다. 운 좋게 교통사고를 당한 어린아이를 구출하면서 지방신문에 대서특필되며 영웅으로 거듭나기도 한다.

하지만 늘 가슴 한구석 낙인 찍힌 범죄자의 이름은 지워지지 않는 슬픈이름, 살인마 에릭을 사회적 오해와 편견이라는 폭력의 한가운데로 몰아 넣는다.

<보이 A>는 영국 범죄사상 가장 충격적이고 슬픈 사건으로 기록된 <제임스 버거> 사건을 통해 제기된 영국의 소년범죄 문제를 다룬 원작소설을 기반으로 한다. 속죄와 용서라는 큰 틀 안에 소년범죄자들을 바라보는 영국사회의 편견과 오해들을 정면으로 고발하고 있는데, 영화 속 재판과정에서 검사가 배심원을 향해 내뱉는 독설은 사회가 소년범죄자를 바라보는 차가운 시선을 표현하고 있다.

소년범죄자에게 중형을 내려야 하는 이유는 이들을 교정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우리의 아이들을 악(devil)으로 부터 보호하고, 격리하기 위함이다.

존 크로울리 감독은 이러한 편견을 우회적으로 반박하기 위해서 영화 속 잭의 일상 속에 과거를 교차 편집하는 방식을 선택하고 있다. 어머니가 암투병 중이고, 담배에 쩔어 지내는 아버지는 애정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 볼래야 볼수 없다. 무관심,애정결핍으로 일그러진 잭의 유년기는 늘 외롭기만 하다. 끔찍한 살인의 주도적인 실행자인 잭의 친구, 필립 역시 형의 폭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올바른 인성과 가치관이 채 성립되기 전에 겪어야할 문제들을 보듬어 줄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적 배경을 이해하지 못하고, 결과론적인 범죄행위의 사실관계에 입각해서 범죄의 경중을 판단하는 영국사회의 슬픈 단면이 영화 속에 들어있다. 이는 비단 영국사회의 문제에만 국한되는 상황은 아닐 것이다. 우리사회의 현실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에 더욱 공감이 간다.

잭이 새로운 삶에 정착할 수 있도록 그토록 온정을 쏟아 붓는 보호감찰사 테리 역시 아들에게는 온전한 애정을 베풀지 않는다. 
테리의 아들은 관심과 사랑을 누리지 못해 무기력한 삶, 방황하고 저항하는 태도로 일관하는 캐릭터로 그려지면서 소외받는 청소년의 슬픈 현실을 더욱 강조하고 있는듯 하다. 사실 이부분이 아이러니 한 부분이긴 하는데, 우리가 범죄로부터 약자를 보호하고, 정의를 세우는 일이 중요하다고 외치지만 정작 보호와 관심이 필요한 대상을 돌아보고 있지 못한 것은 아닌지를 우회적으로 꼬집는 듯 느껴졌다.

살인자 에릭이 다시 살기 위해 선택한 이름 잭은 결국 지워지지 않는 슬픈 이름으로 돌아오고 만다. 약자를 구원하지 못하고, 보호해야 할 이름들을 지켜주지 못하는 오해와 편견은 분명 거대한 사회적 폭력이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 쳐 놓은 울타리 안의 무관심 그리고 그로 인해 상처받고, 고통받는 우리현실의 가장 슬프고도 처연한 이름이 바로 보이 A다.



1. 잭버리지 역의 앤드류가필드는 표정 속에 천진난만함과 불안함, 혼돈과 분노를 차례로 녹여내는 재주가 돋보인다.

2. 실제 영화는 1993년 영국을 흔들었던 <제임스 버거>사건을 다른 시각으로 그려낸 수작이다.

3. 시네아트 광화문에서의 관람은 언제나 영화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관객들이 많아서 즐겁다. 어떤 영화든 엔딩크레딧 이후 자막이 모두 올라가기 전에 자리를 뜨는 관객이 단 한명도 없었다.


4."절 구해주셔서 감사드려요.아저씨는 칼을 든 천사에요." 라는 편지 부분은 특히나 마음을 짠하게 만든다.

2009년 5월 26일 화요일

[렛미인] 왕따 소년과 뱀파이어 소녀의 몽환적 이야기.


색다른 뱀파이어 영화 렛미인.
종종 같은 소재의 영화지만 색다른 영화가 있다. 뱀파이어를 소재로 하고 있지만 전혀 뱀파이어 영화같지 않은 영화. 하지만 뱀파이어 영화의 색을 고스란이 담아낸 영화가 렛미인이다. 스웨덴 작가 욘 린퀴비스트의 베스트셀러 <Let the Right One In>을 각색한 <렛미인>(Let Me In)은 초대받지 않으면 결코 인간의 방에 들어올 수 없는 뱀파이어의 속성에서 가져온 제목이다.

최근 뱀파이어를 소재로 박찬욱 감독의 '박쥐'도 화제를 불러오고 있지만 오히려 렛미인을 더욱 높이 평가하고 싶다. 기존 뱀파이어 영화의 서사적 구조는 피를 갈구하는 뱀파이어를 통해 인간내면의 욕망과 타락, 혼돈을 주로 묘사한다. 의례적으로 뱀파이어에 대항할 나무 말뚝이나 마늘 등이 등장한다. 대게 영화의 초점이 이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경향이다. <렛미인>은 그 시작부터가 다르다.


<렛미인>에서 뱀파이어는 귀여운 소녀다. 창백한 얼굴의 수수께끼 소녀 이엘리가 그 주인공이다. 이엘리의 아버지[footnote]영화를 끝까지 보고 나면 깜짝놀랄 반전이 숨어 있지만 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지나치는 관객들도 있다.[/footnote]가 살인을 통해 피를 공급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실수라도 하는 날엔 딸의 혹독하고 신경질적인 반응을 감내해야 하는 어찌보면 블랙코미디[footnote]아버지는 오스칼의 미래일지도 모르겠다.[/footnote] 같은 장면도 보여준다.

한편 옆집에 살고 있는 하얀 피부에 금발. 허약하고 소심해서 늘 주변으로 부터 왕따며 괴롭힘 당하기 일쑤인 오스칼이 이엘리와 더불어 영화의 주인공이다. 심약한 탓에 반친구들에게 <역겨운 돼지>라는 놀림을 당하지만 저항하거나 반격하지 못한 채 고작 상상 속에서 그들을 혼내주거나, 처단하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을 뿐이다.

둘의 조합을 통해 감독은 서로가 가지지 못한 부분을 공감하고 교감할 수 있는 관계를 자연스레 풀어낸다. 마치 두 인물이 상반된 성을 가진 캐릭터가 아니라 서로의 상상 속에 동일한 인물같은 상상을 하게 된다. 즉 오스칼의 입장에서 이엘리는 자신을 보호하고, 자신에게 해를 가하는 세력을 처단해 줄 힘, 용기, 의지를 불어 넣는 강력하고도 절대적 힘을 가진 동경의 대상이다. 아울러 평범한 인간으로 고민하고, 낮에 활동할 수 있으며, 인간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오스카는 이엘리의 희망이기도 하다. 물론 영화를 바라 보는 해석 정도에 따라 느낌과 생각이 달라질 수 있는 영화다.

왕따, 폭행, 성적 암시 등 거칠고 잔혹하고 어두운 인간의 불완전성을 조명

영화는 단순하게 뱀파이어에 얽힌 에피소드를 풀어 놓는 듯 하지만 영화 속을 들여다 보면 많은 코드가 엉켜 있다. 감독은 스웨덴이라는 공간을 표현하거나 스웨덴 사회의 모습을 투영하려는 목적은 없다고 메이킹필름에서 강조한다. 다만 영화라는 작은 공간 안에 복잡하게 생각할 거리를 많이 유도하는 느낌이다.

뱀파이어가 피를 갈구하는 이유가 욕망을 채우기 위한 폭력과 살인이 아니라 삶을 이어가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라는 설정 자체가 특이하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컬트무비 느낌이 물신 풍겨오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갈등의 구조는 이엘리보다 오히려 오스칼의 주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왕따 당하고 폭력의 대상으로서의 오스칼은 답답하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맞서서 저항하지 못하는 오스칼이 안스러울 뿐이다. 하지만 이것이 철저하게 계산된 감독의 치밀한 의도다. 이엘리를 통해서 용기를 얻게 되고, 저항의 힘을 키우게 되는 오스칼의 성장은 이를 바라는 관객의 바람을 영리하게 실현해주는 듯하면서도 서사적 구조의 인과관계를 잇는 고리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렛미인은 섬뜩한 장면의 과도한 노출없이 인간내면의 잔혹성을 상상하게 하는 공포물로 최고의 경지에 오른 영화라고 생각한다. 앞서 이야기 한바 있듯이 오스칼이 이엘리고, 이엘리가 오스칼 즉, 오스칼 내면의 폭력성이 발현되고, 결국 연쇄살인범으로 발전된다는 상상에 도달하는 순간 한 없이 잔인하고 섬뜩한 공포물이 된다.


관객 스스로 상상하게 하고,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도록 만드는데는 여러가지 상징적인 의미들과 암시가 사용된다. 이를테면 오스칼이 이엘리를  향해 초대 받지 않으면 절대 방에 들어 올 수 없냐고 되묻는 장면, 이를 무시하고 들어오는 이엘리의 얼굴이 피로 범벅이 되는 장면, 이를 보듬어 주는 오스칼의 몸짓은 해석에 따라 다양한 상상이 가능하다. 이엘리의 성적인 정체성을 모호하게 하는 장면도 이엘리가 옷을 갈아입는 장면 안에 짧게 이엘리의 하체를 비추는 카메라 워크를 통해 확인 할 수 있다.

또한 이엘리가 떠나간 방안을 거니던오스칼의 몸짓이며, 이엘리가 떠나는 창문에 가져댄 손 아래로 자욱이 남지만 이내 사라지는 장면, 마지막 가방 속에 이엘리를 숨겨 다른 마을로 향하는 오스칼의 모습 등은 관객들로 하여금 온갖 상상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시퀀스다.

이 모든 것이 의도된 연출이라는 생각이 강하다. 소년과 소녀가 만나고 애정을 나누며, 의지하고 보듬는 단순한 뱀파이어 영화가 아니라 12세 아이의 내면이 변화하고, 폭력성이 발현되는 순간을 뱀파이어라는 존재를 빌어 표현한 것 뿐이다. 이것이 관객에 따라서 한편의 서정적인 동화처럼 보일 수도 있고, 애틋하고 몽환적인 사랑이야기로 비춰질 수도 있다.

감독 스스로도 이를 유도한 듯한 뉘앙스를 인터뷰를 밝힌 바 있다. 토마스 알프레드슨 감독은 관객이 마지막 시퀀스를 통해 해피엔딩을 상상해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는 말을 전하고 있다.


<렛미인>에서의 뱀파이어는 결국 우리 자신의 모습이다. 우리가 눈에 익은 초월적인 힘. 강력한 존재로서의 뱀파이어가 아닌, 살기 위해 피를 갈구할 수 밖에 없는 본능적이고 동물적인 존재로서의 뱀파이어다. 그리고 무엇인가를 갈구하기 위해 힘들게 지나쳐온 청소년기에 한번 쯤은 존재했을 법한 우리 자신 내면의 괴물에 관한 이야기다. 상상하는 모든 것이 투영될 수 있는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이야기. 영화<렛미인>은 놀랍고 섬뜩한 우리 모두의 공포영화다.





2009년 5월 22일 금요일

[어톤먼트] 어톤먼트 단평.


우리말로 풀어쓰면 어톤먼트[atonement]는 속죄다.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 중에 소설을 뛰어 넘는 평을 듣는 작품은 드물다. 어톤먼트 역시 그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는 평이 다수다. 어톤먼트는 단순한 사랑에 관한 영화인듯 보이지만, 한 소녀 인생에 원죄가 되었던 사건, 세 사람의 인생을 통째로 바꾸어 버린 한토막의 사건에 대해 복잡한 시점과 시선을 보여준 영화다. 그 속에 질투와 시기, 애증과 그리움, 후회와 회한을 골고루 표현해내는데 모자람이 없는 수작이다.

영화 곳곳. 타자기 소리처럼 청각을 자극하는 요소가 인상적이다. 강약과 템포는 의미를 함축하고 그 함의에 대해 깊은 시간 사유하게끔 한다. 실질적으로 속죄의 근간은 짝사랑을 바탕으로 하는 시기와 질투에 있음을 매끄럽게 표현해낸 것 하나로도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21번째 소설 '어톤먼트'를 통해 과거로 회귀하여 속죄하고 싶은 노소설가의 소회가 처연하다. 아울러 바람과 반전이 교차하는 시퀀스는 단연 압권이다.

<세실리아[키이라나이틀리]보다 오히려 흡입력있는 연기를 보여준 시얼샤로넌>

하지만 아쉬움도 그만큼 크다. 요컨대 초반 똑부러진 연기로 주목성이 높았던 브라이오니의 소녀시절 모습과 5년의 시간이 흐르고 성장한 후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이질감은 극초반 탄탄하게 다져 놓은 캐릭터에 대한 몰입과 이해를 심각하게 방해한다. 이는 갈등과 반목 사이를 느슨하게 만들어 버리기도 한다. 소설 속의 전쟁부분과 캐릭터의 고뇌부분은 치밀한 묘사로 이루어진 원작의 일부분을 생략하여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그럼에도 원작의 일정부분을 계승하려는 노력, 나름의 향기를 충분히 만들어낸 감독의 공은 박수를 쳐주고 싶다.


2009년 5월 19일 화요일

사랑을 표현한 아름다운 영화들.

세상에 수많은 사랑이 존재한다. 복잡 다양한 감정은 인간의 이성적인 힘으로도 주체할 수 없는 소용돌이와 같다. 다양한 사랑에 대해서 나름의 정의를 내리기 위한 영화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다.


# 운명적 사랑. –러브어페어-

누구나 운명적인 사랑을 꿈꾼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 사랑은 우연에서 시작되었다가 필연으로 다가 오는 달콤한 솜사탕과도 같다. 그 달콤함을 가로막는 장벽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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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적 사랑에 관한 영화 러브어페어. 은퇴한 풋볼선수 마이크 갬브릴(워렌 비티 )과 미모의 미모의 테리 맥케이(아네트 베닝 ) 사이의 우연이 운명으로 발전하는 화면이 아름다운 영화다. 엠파이어 스테이츠 빌딩에서 기약 없는 만남을 약속한 둘은 만일 누구 하나라도 나오지 않더라도 이유를 묻지 않기로 한다. 그들의 운명적 사랑이 과연 결실을 맺을 수 있을지를 잠자코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풍요롭다.


# 미스테리한 사랑 –러브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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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년대 감성적인 스토리와 화면 구성으로 이와이순지 감독의 두터운 팬 층을 만들어준 영화 러브레터. 아픈 상처는 오직 사랑으로만 치유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영화다. 어느 날 죽은 옛 애인으로부터 답장을 받게 되는 와타나베 히로코는 과거의 사랑을 찾아가는 여정을 통해 다시금 죽은 연인 이츠카에 대한 사랑을 더욱 숙성 시킨다.

결국 미스테리한 편지의 주인공과 그를 둘러싼 또 하나의 사랑을 확인하는 히로코는 진정 자신 안에 가두어 두었던 사랑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이처럼 사랑은 영원히 풀리지 않을 미스테리한 존재와도 같다.


# 비극적인 사랑. – 로미오와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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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일약 스타덤에 올려준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은 고전에서처럼 이루어질 수 없는 비극적 사랑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사랑의 가장 큰 장애 중 하나는 당사자를 둘러싼 배경과 환경일 수 있다.


원수집안이라는 악조건 속에서 싹튼 애틋한 사랑. 달콤한 사랑 뒤에 오는 쓰디 쓴 아픔과 실연은 비록 현실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꿈에 지나지 않지만 목숨을 내 놓고서라도 숭고한 사랑으로 결실을 맺는다. Kissing you 주제곡이 더욱 애잔한 로미오와 줄리엣은 비극적 사랑의 결말이 아직 끝나지 않은 사랑이었음을  보여 준 영화다.


# 엽기적인 사랑. - 엽기적인 그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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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녀 열풍을 몰고 온 엽기적인 그녀는 유쾌하고도 발랄한 사랑의 이야기다. 전지현이 가장 전지현 다울 수 있도록 만든 영화 엽기적인 그녀는 단순히 웃고 즐겨 넘길 사랑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쉽게 사랑을 이야기하고 , 쉽게 이별을 고하는 인스턴트 사랑에 대한 따끔한 충고를 하는 듯, 진중하면서도 눈물겨운 사랑. 그리고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인 기다림을 아름답게 담아낸다. 상대방을 향하는 진실은 서로간의 아픔을 치유하는 최고의 영약이다.


# 옴니버스식 사랑 –러브액추얼리 –

세 상 사는 것이 울적해 질 때면, 나는 공항에서 재회하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보편적으로 우리는 증오와 탐욕 속에 산다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랑은 어디에나 있다. 굳이 심오하거나 특별한 것이 아니어도 어디에나 존재한다. 아버지와 아들, 엄마와 딸, 아내와 남편... 남자 친구,여자 친구, 오랜 벗...

무역 센터(Twin Towers)가 비행기 테러로 무너졌을 때, 그곳에서 휴대폰으로 사람들이 남긴 마지막 말은 증오나 복수가 아닌 모두 사랑의 메시지였다. 조금만 주위를 둘러보면 사랑은 실제로 어디에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 영화 러브액츄얼리 중에서


진 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이야기하기엔 에피소드 하나만으로 부족하다며 여러 가지 사랑을 하나의 영화에 예쁘게 담아냈다. 해바라기 짝사랑도 있고, 사회적 지위와 명성조차 무너뜨린 참사랑도 있다. 십 수년 간 희생과 배려로 동료를 사랑해온 한 늙은 가수의 매니저가 있고, 국적을 초월한 사랑도 빛을 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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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어리지만 여자친구에게 사랑을 고백하기 위해 비행장으로 열심히 달려가는 풋사랑도 인상적이다. 오랜 기간 짝사랑한 사람보다 가족의 존재를 더욱 값지게 여기는 소중한 사랑도 있다.


사랑은 복잡, 다양하지만 늘 우리 주변에서 찬란히 빛남을 가슴 깊숙이 깨닫게 해준 진정한 사랑들의 하모니 러브액츄얼리를 영원히 잊을 수 없다.


사랑을 정의 내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규정짓기엔 그 실체는 너무나 크고 다양하기 때문이다. 사계절이 바뀌듯 자연의 실체가 순환하듯 늘 그렇게 사랑도 우리주변에서 변화하고 순환한다. 늘 이런 사랑이 우리 주변에 있을 뿐이다.

페넬로피 (Penelope, 2006) 단평


아무리 다뤄도 질리거나 식상하지 않는 소재가 있다면 바로 사랑이 아닐까. 패넬로피는 동화 속의 사랑을 옮겨 놓은듯 솜사탕같이 녹아드는 영화다. 입안 가득 달콤한 향이 오래 남는다.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불운한 돼지코의 저주를 품고 태어나 25년간 부모로부터의 지나친 관심의 테두리에 갇혀 지낸 소녀의 세상 밖 사랑찾기 일탈 프로젝트 정도.


흡사 팀버튼의 영화를 연상하는 기발한 상상력과 이를 따라잡는 빠른템포의 카메라움직임은 지루함을 덜어준다. 군데군데 몽환적 화면과 어우러지는 시퀀스는 런닝타임동안 위화감 없이 눈에 익은 풍경마냥 조화롭다.

사실 영화보다도 크리스티나 리치라는 배우에 눈길이 간다. 죠니뎁과 호흡을 맞췄던 슬리피할로우에서의 신비감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외형상 흉한 배역을 소화했지만 그 속에 천진하면서도 앙탈스럽고, 당당하면서도 엉뚱한 귀여움을 끌어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후한 점수감이다.



흉물스런 외형 속에 숨겨진 실제 패넬로피의 모습을 영화내내 상상하게 만든다. 저주가 풀리고 난 후의 얼굴이 돼지코의 모습보다 더욱 낯설고 이질감이 느껴지는건 그 만큼 관객을 배역에 몰입하게끔 나름의 매력을 발산했다는 증거이기도하다.

영화자체는 미녀와 야수의 성별 역할관계를 뒤집어 놓은 정도로 다소 진부하다. 진정한 사랑은 내면에서 빛을 발한다는 통속적이고 보편적인 교훈 역시 식상하다. 그럼에도 지루하지 않고 화면을 쫓아갈 수 있는 것은 단연 머플러위로 뿜어져 나오는 크리스티나 리치 발군의 눈빛 연기때문이 아닐까.

2009년 5월 17일 일요일

[님은 먼곳에] 풀리지 않을 의문 ‘님은 먼곳에’


'님은 먼 곳'에 일단 말이 많을 것 같은 영화다. '말이 많을 것'이란 표현은 논란의 여지가 다분할 것이란 의미다. 사유를 많이 하게끔 만드는 영화를 좋아하는 관객은 오랜만에 깊이 사색하는 영화를 만나서 반가울테지만 편히 볼 수 있는 휘발성 대작들에 익숙해진 관객에겐 불친절한 영화로 비춰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 이준익감독이 만든 영화 중에서는 가장 후한 점수를 주고 싶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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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리지 않는 의문
가부장적인 시대의 여성 '순이'(수애)는 본인에게 애정이 그다지 없는 남편(엄태웅)을 군에 보내고 매달 마지못해 면회를 가야만 하는 처지다. 집안의 대를 이어야하는 중차대한 책임만을 종용하는 시어머니 때문에 더욱 어깨가 무겁기만 하다. 더군다나 남편의 마음은 순이가 아닌 여인에게 가있고, 현실의 책임마저 순이 본인이 떠안아야 하는 불운한 상황이다. 그래서 시어머니의 홀대도 참아내야 하고, 남편이 애인과의 이별로 머나먼 베트남행을 선택한 것에 대한 질책 역시 마냥 감내해야 하는 처지다. 여기까지만 이견이 없을 줄거리다.


영화는 이후부터 펼쳐지는 상황에 대한 모든 것을 철저하게 관객에게 떠넘겨 버린다. 요컨데 왜 순이는 남편을 찾아 베트남으로 향했는지 무엇이 순이로 하여금 억척스레 전장의 한가운데로 자신을 내던야했는지에 대한 명확하고 구체적인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순박한 시골처녀 순이가 위문공연밴드의 씽어 '써니'가 되어가는 과정 속에 그 어디에서도 인정받지 못했던 본인의 모습에 열광하는 군인들로 삶의 위안과 존재감을 느낄 뿐이다. 그리고 갖가지 상상을 할 수 있는 정황들만 영화 곳곳에 던져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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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영화는 매력적이다. 순이가 과연 운명적인 만남을 이룰 것인가에 대한 궁금증은 영화가 끝나면 이미 다른 의문으로 변해 있다. 앞서 주어진 정황들을 다시금 떠올리게 하고 퍼즐을 맞추듯 유추하는 재미가 바로 관객의 몫인 셈이다. 한가지 권하고 싶은 것은 꼭 주변의 여성과 영화를 보고 순이의 심리상태에 대해 함께 이야기할 시간을 가지라는 것이다.


전쟁을 바라보는 색다른 시선
이준익 감독이 상상하는 1971년의 베트남은 기존에 전쟁영화에서 그려졌던 풍경과는 다소 다르다. 전쟁 속의 참혹함, 전장의 급박하고 건조한 상황을 최대한 현실감 있게 담아낸 것은 별반 다를 것이 없지만 단순히 우군과 적군,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으로 전쟁에 참여한 대상을 양분하는 시선은 철저하게 피하고 있다. 베트콩을 바라보는 시선은 헐리웃 영화들의 반드시 때려잡아야 할 악의 대상이 아니라 전쟁의 이데올로기에 희생된 순박한 눈을 가진 동일한 인간일 뿐이다. 이를 표현하기 위해서 직접참여한 군인보다는 주변의 간접체험자가 필요했고 남성 보다는 여성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시선이 필요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순이의 눈에 담겨진 전쟁은 그래서 색다르면서도 공평하다.


영화 최고 미덕은 음악.
영화 내부적으로 또 하나의 미덕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영화음악을 꼽는다. 음악으로 시작한 영화는 음악으로 그 끝을 맺는다. 하나같이 절절이 와 닿지 않는 노래가 없다. 이준익 감독은 시사회에서 30년전에 부모님 세대들에서 유행한 좋은 음악들이 묻혀가는 것이 아쉬웠고 당시의 문화를 지금같이 즐기면서 세대간의 단절을 봉합시키고 싶은 마음에서 라디오 스타, 즐거운 인생, 님은 먼곳에 모두 70-80년대 음악을 사용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가장 축이 되는 음악은 김추자의 '님은 먼곳에'. 애잔하게 울려퍼지는 '님은 먼곳에'는 피부가 찌릿할 정도의 전율을 가져다 준다. 구슬프기도 하고 때론 공포에 젖어 있기도 한다. 한 없는 안정감을 가져다 주기도 한다. 그 밖에 순이가 부르는 노래들 '간다고 하지마오','울릉도 트위스트' , '수지큐'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는 수애라는 배우의 캐릭터를 살리는 적절한 노래들이다. 그 표정 안에 다양한 변화를 담아낸 수애의 연기를 지켜보는 것 역시 또 하나의 재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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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평
힘들게 도착한 마지막 시퀀스가 영화를 보고 꽤 오래 지난 지금까지 맴돈다. 그 만큼 여운이 깊다. 남성분들이라면 꼭 여성분과 함께 영화를 관람하기를 추천한다. 영화를 보고 난 후에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즐거울 영화다. 나머지 배우들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지만 따로 이야기하지 않아도 제 위치에서 영화를 살리는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영화를 감명 깊게 본 사람이라면 반드시 수애가 부른 '님은 먼곳에'를 인터넷에서 뒤적거릴 것이고 노래의 가사를 음미하며 영화를 다시 떠올려 볼 것이다. 오랜만에 좋은 영화 한편이 반가운 하루다.




2009년 5월 15일 금요일

[김씨 표류기] 도시에 표류하는 외로운 영혼들.


자살을 거꾸로 하면 아이러니하게도 '살자'가 아니던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것이 해방을 의미하고, 해방이 곧 구원인 사내. 그야말로 팍팍한 인생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채 빚에 쫒기고, 애인은 변심하고, 구조조정으로 거리에 내몰린 상황. 희망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다. 막장 삶을 편안히 마감하려고 한강다리 밑으로 뛰어내렸건만 정신을 차려보니 이게 왠일 밤섬이더라.


63 빌딩에서 간단히 몸을 날리는 편이 나았다라고 후회해봐도 소용이 없고, 넥타이에 목을 메달아 생을 마감하려니 살 떨리는 순간에 왠 설사냐. 생리현상 앞에서는 자살이고 뭐고, 일단 벨트부터 풀 수 밖에.

큰 볼일 중(?)에 눈 앞에 펼쳐진 사루비아는 참으로 달콤하기만하다. 이렇게 달콤함을 느껴본 적이 언제였던가를 떠올리니 아득하기만 하다. 뭔가 깨달음이라도 얻은 뒤 돌아가야할 곳을 포기한 인간 김씨의 밤섬 표류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캐스트어웨이의 톰행크스처럼 '밤섬'이라는 좁은 섬에 갇힌 한 사내의 좌충우돌 이야기를 기대하고 극장을 찾은 사람이라면, 조금 의외의 영화를 만날 수 있다. 아니 그 이상의 의미는 건질 수 있는 영화다. 그만큼 특별하다.


영화의 주요 공간은 김씨가 활약하는 작은 밤섬과 싸이질이 유일한 낙인 짜가신상녀의 어지러운 방이다.  특별할 것 없이 반복되는 무기력함이 공존하는 두 공간은 어찌보면 정처없이 표류하는 현대인의 일상적 삶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축소판 같다. 아둥바둥 뒤돌아 볼 겨를 없이 살아온 사람들이나, 인터넷 너머의 공간에 철저하게 이중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단면을 옮겨 놓은 듯하다. 그 안에 고립되고 단절되었지만 희망을 이야기하고, 진화하는 인간의 무한함, 의지와 끈기, 불굴의 몸부림을 웃음으로 풀어내는 재능이 참으로 돋보인다.

한마디로 마음편하게 그리고 속시원하게 웃을 수 있는 영화다. 엉뚱해서 유쾌하고 상상이상의 즐거움이 그득하다. 그렇다고 웃고만 있기에는 너무도 가슴 찡한 시퀀스가 몇몇 보인다. 김씨표류기의 '김씨'에게서 아는 사람의 '동치성'과 '똑바로 살자'의 정도만이 겹쳐서 떠오르기도 한다. 정말이지 정재영이 뿜어내는 웃음과 슬픔을 동시에 몰입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운 영화다.

정재영은 그렇다치더라도 정려원이야말로 새로운 발견이다. 제대로 배우가 된 듯한 모습이다.  문명 속에 고립된 외로움, 치유되지 않은 과거에 대한 두려움, 쳇바퀴처럼 반복된 무기력함에 갇혀 사는 캐릭터를 잘 소화해냈다.


현실 공간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늘 피해의식에 갇혀 사는 신상녀로서의 삶은 측은하기까지 하다. 단순히 김씨표류기가 캐스트어웨이의 오마주 수준에 머무르지 않는 것은 두가지 고독과 외로움을 링크처럼 연결하고, 치유하는 과정을 담아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현실 속에 자아와 만나는 방법, 희망을 체득하는 과정이 잔잔하다. 고립과 단절을 넘어, 디지털 차가운 텍스트의 한계를 뛰어 넘는 아날로그적 감성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이다.

여유를 갖지 못하고 한동안 웃어본 적이 없었던 사람, 내 삶 속에 편견과 오만을 버리고 싶은 사람, 희망이라는 비타민이 필요한 사람에게 꼭 추천해 주고 싶은 영화가 바로 김씨 표류기다.

1. 올해 본 영화 중 최고.

2. 영화를 보고 나서 가장 먹고 싶은 음식 짜파게티와 자장면.

3. 캐스트 어웨이가 페덱스 윌슨배구공을 PPL 했다면 김씨표류기는 오뚜기 케찹, 소니카메라, K2 배낭, HJC 헬멧 정도를 PPL하지 않았을까.... 머니머니 해도 짜파게티는 압권.

4. 영화 보고 자장면을 먹어주는 센스도 필요하겠다. 그것이 자장면에 대한 그 동안의 오만과 편견에 대한 반성이 될테니.... :)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 결핍된 가족애의 필연적 비극.

영화 시작 전 자막은 영화의 모든 것을 담아내는 메타포.

    아마도 당신은 30분간 천국에 있을 것이다.

    악마가 당신이 죽은 것을 알기 전까지는….


영화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라는 제목은 아일랜드 축사 ‘May you be in heaven a half hour Before the devil’s knows You’re dead’ 에서 유래한다. 악마가 죽음을 인식하기 30분,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지기 전까지 쾌락에 머물 수 있는 찬라의 순간을 의미한다.


80세를 넘은 시드니루멧 감독은 영화를 통해 인간이 탐할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한 욕망이 얼마나 큰 비극을 초래할 수 있는가를 너무나도 짜임새 있게 그려 놓았다.


다소 선정적인 장면(부부의 정사장면)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마약중독자면서 분식회계로 감사팀의 조사압박에 시달리는 형 앤디와 자녀의 양육비 조차 제대로 구하지 못해 아내와 딸에게 늘 당당하지 못한 동생 행크가 주축이다. 형 앤디는 회사자금을 횡령한 혐의로 의심을 받고 있는 상태고, 동생은 딸의 학비조차 챙길 수 없는 상황으로, 금전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압박이 심하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별달리 뾰족한 수를 찾지 못한 형제는 결국 범죄를 모의한다.



형 앤디는 회계감사의 압박으로 벗어날 자금을 만들어 아내와 함께 브라질로 떠날 단꿈을 젖어있고, 동생 앤디는 딸아이의 양육비를 안정적으로 제공할 수 있는 당당한 아버지의 모습을 꿈꾼다. 둘은 그렇게 작은 보석가게를 털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놀랍게도 형이 털자고 제안한 보석 가게는 다름아닌 부모님의 가게다. 다소 패륜적인 코드로 시작하는 범죄모의 설정은 영화의 비극을 암시하는 전주곡이다. 계획실행 당일 소심한 행크는 과격한 친구 바비를 끌어들이게 되는데, 계획이 틀어지는가 싶더니, 우발적인 사고로 어머니가 살해된다.


어머니인 동시에 아내를 잃게 된 앤디 가족은 거의 공황상태다. 하지만 영화는 비틀어진 사건에 머물러 있지 않고, 가족의 잔혹스런 사건이 진행되기 전 후, 약 일주일을 교차 편집으로 엮어내면서, 가족의 보이지 않았던 문제와 그 속에 내재된 갈등과 반목을 밀도있게 그린다.


처음에는 단지 우발적인 사건 속에 진행되는 해프닝과 인간심리에 초점을 맞춘 영화 정도로 생각하게 하더니 살짝 그 뒤로 얽히고 섥힌 문제들을 하나 둘 끄집어내는 식이다.꽤나 무거운 가족관계와 사회전반의 문제는 인과관계가 잘 맞물려 서로 톱니가 물린듯이 궤를 함께 한다. 연출이 세밀하고 섬짓하다. 원인들을 훑으면 훑을수록 가족간의 건조함에 숨이 턱턱막힌다.



이는 분명 한가족사의 문제만을 염두에 둔것 같지는 않다. 보편적 도덕관념과 이성적인 사고의 한계를 벗어나긴 하지만 누구나 한번쯤은 상상해봄직한 일들을 이더욱 불편한 현실로 만드는 재주가 있는 것 같다. 관객은 스스로도 충분히 위태로운 감정이입을 할 수 밖에 없다. 이것이 거장 시드니루멧 감독식 드라마의 힘이아닐까.


형 앤디와 동생행크뿐 아니라 아버지와 형의 아내의 관점에서 교차편집되는 시퀀스를 통해 건조한 가족관계와 환경 그 속에 앤디의 원초적인 욕구불만과 분열을 그려낸다. 하지만 애초에 평화롭던 가족의 한순간의 실수와 같은 사건으로 비극이 초래된 것은 아니다.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 속해 있으면서도 정작 애정을 나눌수 없었던 그래서 더욱 느슨한 관계, 불편부당한 연결고리안에 서로를 이해하고 보듬을 수 없었던 환경이 필연적으로 비극이 초래될수 밖에 없는 인과관계의 핵심이다.


결핍된 가족애와 비극.

비단 한가정의 문제가 아니라 미국자본주의의 차갑고, 어두운 가족사회를 정면으로 비추고 있는듯한 느낌이다. 부모는 보석상을 운영하며, 풍족한 삶을 영위하는 반면 큰 아들은 동생에 대한 부모의 편애를 증오하고, 우유부단하며 유약하기만 한 동생 행크는 금전적인 도움을 전혀 받지 못하고 있다. 마치 가족이 아니라 개별적인 가족 즉 세대별로 단절된 모양새다. 애정의 결핍, 서로간의 소원한 관심때문에 결국 작은 사건이 큰 비극의 단초가 되고 만다.


마약에 쩔어 있는 형, 형수와 섹스를 즐기는 동생, 아들보다 아내를 사랑하는 가장의 모습은 분명 막장스런 가족의 진수를 보여준다. 평온하던 가족이 잔혹사의 중심에 서게 된 것도 애초부터 초래될 수 밖에 없는 환경때문이 아니었을까. 결국 행크도 앤디도 행크의 아내도 모두 결핍된 가족애의 피해자인 셈이다. 그저 가족이라는 느슨한 관계의 이름으로만 명맥만 유지되는, 문제투성이의 가족관계는 서로를 더욱 폭력적으로 그리고 억압하고 단절할 수 밖에 없는 존재가 아었을까.


사건과 사건을 구성하는 과정과 결과들이 잔혹한 것이 아니라 환경을 거스를 수 없는 인간 본성의 사악함이야 말로 비극이고, 지옥인 것이다. 행크는 그 지옥에서 아마도 달콤한 30분의 찬라를 보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2009년 5월 14일 목요일

[노잉] 세상을 향해 던지는 마지막 경고.


노잉을 뒤늦게야 봤다. 이처럼 재미있고 흥미로운 영화에 대해서 왜 그렇게 말들이 많은지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들이 있었다. 노잉을 추천하는 사람들은 해프닝을 재미있게 보았다면 분명 이영화 역시 그 이상일 것이란 말을 아끼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해프닝만큼이나 긴장감과 스릴을 느끼면서 볼 수 있는 역작이라고 생각한다.


# 노잉은 단순한 재난 / 재앙영화가 아니다.

일단 노잉의 홍보 포스터에 표기된 문구부터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대부분 이 영화를 기존의 재앙이나 재난 영화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영화의 피상적인 부분만을 이해한 편협함에서 비롯된다.


노잉의 세계관은 신의 존재 여부, 좀 더 확장하면, 창조론과 진화론, 기독교적 종말론과 지적설계론을 아우르는 정신에서 시작된다. 지구상에 존재했던 수 많은 재앙들이 이미 예견된 것이었고, 이것은 단순히 초자연적이거나 우연에 기인한 현상들이 아니며, 철저하게 결정되어 있는 운명적인 미래일 뿐이라는 것이 영화 전반에 깃들어 있는 모체다.



영화 <지구가 멈추는 날>에서처럼 지구를 구하기 위해 인류 문명을 파멸시키고자 하는 메신저(외계생명)의 계획들 처럼 영화 노잉에서의 인류멸망(리셋) 역시 시차를 주고 꾸준한 경고의 메세지를 보낸다. 기독교적 세계관과 흡사한 부분이 있지만 주체가 신이 아니라 오랫동안 지구를 지켜보고 꾸준히 경고의 메세지를 보내 왔던 메신져(외계생명)라는 점에서 차별점을 가진다.


지구 멸망이 진행되고, 마지막으로 간택 당한 순수한 사람들은 새로운 정착지로 인도되고 인류를 창조한 어떤 초자연적인 힘에 의해 다시 인간본연의 원시상태로 되돌려진다. 이는 감독 스스로가 자신에게 꾸준히 되묻는 여러 가지 세계관의 질문들일 수 있다. 영화의 큰 중심이 되고 있는 존 코스틀러의 주변이야기들을 통해서 꾸준히 이야기 된다. 존은 MIT 교수로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지만 기독교적 세계간을 부정한다.


목사인 아버지와 사이도 좋지 않으며, ‘기도해준다’는 동생의 말에도 ‘하지 말라’는 거부감을 표시하기도 한다. 물론 이는 호텔 화재로 아내를 잃은 슬픔에서 비롯된 시니컬한 태도일 수 있지만 알렉스프로야스가 궁극적으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세계관의 본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부분이다. 어떻게 보면 기독교적인 가치나 믿음에 완전히 배반하는 것이어서 미국 영화 평론에서 그처럼 혹독한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 아닐까.


감독 스스로가 세상에 던지는 경고처럼 보였다. 우리가 그처럼 믿고 따르는 종교적인 신념이나 영생을 위한 기도가 실체를 뜯어보면 인간의 이기심에 면죄부를 주려는 또 다른 오만 정도일 것이라는 메세지 영화내내 지울 수 없었다. 그래서 인류 앞에 펼쳐진 수많은 재난과 재앙이 단순히 초자연적인 우연한 사고가 아니라 이를 경고하고 바로잡으려는 최소한의 메세지처럼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는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는 동시에 경고를 이해하지 못한 어리석음에 대한 결과처럼 느껴진다.


누가 복음 17장 26-35절

  1. 시대에 일이 벌어진 것과 같이, 인자의 날에도 그러할 것이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 가고 시집 가고 하였는데, 마침내 홍수가 나서,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2. 롯 시대에도 그와 같은 일이 벌어졌다.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나무를 심고 집을 짓고 하였는데,
  3. 롯이 소돔에서 떠나던 날에,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쏟아져 내려서,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4.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그러할 것이다.
  5. 그 날에 지붕 위에 있는 사람은, 자기 물건들이 집 안에 있더라도, 그것들을 꺼내려고 내려가지 말아라. 또한 들에 있는 사람도 집으로 돌아가지 말아라.
  6.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
  7.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목숨을 잃는 사람은 보존할 것이다.
  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잠자리에 누워 있을 터이나, 하나는 데려가고, 다른 하나는 버려 둘 것이다.
  9. 또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을 터이나, 하나는 데려가고, 다른 하나는 버려 둘 것이다."

<출처 : http://www.holybible.or.kr>


# 재앙의 순간에 나를 던지는 스릴이 두배가 되는 영화 노잉

인류에 대한 경고 안에 내던져진 죤에 감정이입하면 영화는 두 배의 스릴을 가져다 준다. 아비규환의 항공기 추락사고 현장, 귀가 찢어질 듯한 참혹한 지하철 사고의 주변, 죤의 옆에 내가 있다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 영화는 끔직하고, 놀라운 체험을 가져다 준다. 한층 정교하고 사실감 있는 CG는 마치 내가 현장에 있는 긴장과 스릴 사이를 오가게 만든다.



어떻게든 예정된 재앙을 막아보려는 인간의 의지가 되돌일 수 없는 한낱 시도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는 순간은 왠지 허탈감마저 밀려온다. 전 인류를 궁지로 내모는 최악의 순간에서도 약탈과 방화를 일삼는 인간의 무모함과 어리석음이 불바다와 겹쳐지면서 인류 재편(리셋)의 정당성에 상당한 설득력을 부여하고 있다.


스케일을 떠나서 실마리를 풀어나가는 사건 전개와 실체에 대한 진실들의 규명은 충분히 설득력을 가지고 긴장감을 유발한다. 앞서 이야기 한 것처럼 해프닝의 경우처럼 결말이 생뚱 맞거나 이해 가지 않는 관객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상상력, 그리고 그것에 기반한 인류 전체에 보내는 경고 메시지를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로운 영화임에 틀림없다.


2009년 5월 13일 수요일

[미스트] 가장 나약한 존재인 인간의 본질적인 공포.


공포를 소재로 한 영화, 특히나 피가 튀기고 인육이 갈기갈기 뜯겨져 나가는 식의 영화는 보지 않으려고 하는 편이다. 허구인 것을 인지하면서도 그 생생한 표현이 영화 후에도 각인되어 머릿 속에 오랫동안 맴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스트를 보게 된 것은 공포를 소재로한 영화라는 사전 지식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스트를 단순히 입을 양손으로 가려가면서 봐야 할 공포영화의 범주에만 국한시켜 버리기에는 그 전달의 메세지가 너무나 강하다.

# 공포의 시작
극적 상황을 조성하고 관객을 그 상황안에  몰입시키는 방법은 여타의 공포영화에서처럼 평범하다. 대형마트라는 공간안에 사람들을 일단 가두어 놓고 시작한다. 하지만 다른 장르적 영화에서처럼 그 공간은 절대로 빠져나올 수 없는 공포의 공간이거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탈출해야 할 공간이 아니라 자유의사에 의해서 얼마든지 벗어날 수 있는 열린 공간이다.

하지만 사람들 앞에 다가올 공포가 빠져나가야 할 공간인 마트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개(미스트)가 점령한 대형마트의 문 밖 세상에 존재하는 것임을 알게 된 후, 밀폐된 공간에 갇힌 사람들은 고립된채 사태의 추이를 지켜 봐야만 하는 지극히 수동적이고 나약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이 시점에서 그들의 반목과 갈등 그리고 공포가 비로소 시작된다.

# 미스트 속의 인간사회 - 권력, 선동, 종교, 그리고 인간본성이 뒤범벅 된 영화
단절되고 밀폐된 마트 안은 비교적 평화로움을 유지해가지만, 상황은 오래 가지 못한다. 안개가 자욱한 바깥 세상의 위험한 실체(?)를 알게 된 데이빗에 의해 사람들은 술렁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허황된 현실 거짓같은 상황을 전혀 믿지 않던 사람들을 설득하는 일은 그리 쉽지 않다. 안개 속 실체를 인정하고 마트내에 남아야 한다는 부류와 공포의 실체는 거짓이며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측의 의견이 상호 충돌할 때 쯤 이를 대표하는 두 정치적 세력(데이빗과 노튼)간의 대립도 첨예해져 간다.


그 좁은 공간 안에서 하나의 축소된 사회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노튼과 소송문제로 반목의 골이 깊어질 대로 깊어진 마을 사람들과의 갈등은 단순한 대립의 차원을 넘어서 서로를 의심하고 불신을 야기시킨다. 결국 노튼은 본인 권력의 반대급부에 서 있는 데이빗을 무력화시키기 위해(안개속 실체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 위험한 세상으로  뛰어 든다. 결국 자신에 대한 지나친 과신으로 똘똘 뭉쳐진 노튼(변호사)이 그 실체의 희생자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데이빗을 중심으로 그들(?)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대책을 마련한다. 

시시각각 조여오는 공포와 불안 속에서 대형마트 속의 인간들은 점점 나약해져간다. 이를 틈타 미치광이 종교신자정도로만 여겨지던 카모디가 나약한 내면적 불안속에서  안식을 갈망하는 자들을 기반으로 새로운 힘을 결집시켜 나간다. 그녀는 그 힘을 빌어 사람들을 선동하고 안개 속 공포의 세상으로부터 구원 받기 위한 재물만이 살길임을 설파하고 이를 통해서 교주로 추대된다. 사람들 내면속의 공포와 불안은 인간의 본성을 무기력하게 그리고 폭력적으로 변모시키고, 종교에 기댄 비이성적인 다양한 인간군상들의 모습은 그 자체가 하나의 공포로 다가온다.

# 관객들에 대한 조롱 - 결국 당신이 틀렸다.
영화를 보고 나온 많은 사람들은 허탈함을 감출 수 없다. 영화가 재미 없어서가 아니라 허탈한 결말과 그 뒤에 벌어질  주인공의 삶이 상상되기 때문일 것이다. 대단한 리더쉽으로 안개 속의 위험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노력한 주인공을 비웃기라도 하듯 군용 트럭 구출된 무리들 속 한 여인(영화 초반 도움을 외치며 유유히 안개속으로 뛰쳐 나갔던 두아이의 어머니)의 시선과 교차한 후  괴성을 지르는 장면은 가희 영화의  압권이다. 관객들을 조롱하듯 반전이상의 울림을 주는 장면이었다.

결과론적으로 따져 보았을 때에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았더라면 오히려 해결이 될 상황들, 즉 긁어 부스럼을 만들어 버린듯한 장면 속, 씁쓸한  울림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공익을 위해 정치적 세력들이 행한 일들이 안개 속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며 이것이 살수 있는 유일한 대안임을 외치는 리더들의 모습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인간을 둘러싼 사회와 그 안에서 발생하는 정치도 어쩌면 우리가 쳐놓은 안개 속에서의 허상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사람들을 선동하고 현실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종교에 기대어 본들, 인간은 벗어날수 없는 굴레를 등에 진 나약한 존재라는 것, 그래서 스스로 평온한 삶을 영위 할 수 있음에도 오히려 고난의 길을 선택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영화가 끝이나고서도 내내 머리를 어지럽혔다. 결국 나도 그 안개 속의 제한된 삶에서 발버둥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우리 모두가 틀렸다는 것을 관객스스로 느끼게 되기 때문에 더욱 더 허무한 영화다. 머 이것이 지나친 비약이라고 비웃어도 할말은 없지만.


영화 사상 최고의 적수, 맞대결 TOP5

영화에서는 수 많은 적수들이 격돌한다. 갈등과 반목, 질투와 시기가 엇갈린 라이벌이 있는 반면에 서로를 죽여야 하는 절체절명의 상대도 있다. 서로를 이해해가는 과정에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는 맞수도 있다. 여지껏 감상한 영화 중 최고의 적수들 TOP5를 선정해봤다.

# 5위 : 쳡혈쌍웅

아쏭(주윤발) VS 이응( 이수현)


첩혈쌍웅은 1989년작으로 오우삼 감독의 대표작 중 하나다. 대부분 홍콩 느와르의 최고 걸작으로 영웅본색으로 꼽지만 개인적으로 첩혈쌍웅을 한 수 위라 말하고 싶다. 쌍권총과 휘날리는 바바리코트도 여전하고 비둘기 사이로 뿜어져 나오는 화력은 영웅본색을 압도할 정도다.


아쏭(주윤발) 과 이응(이수현)은 킬러와 경찰로 쫓고 쫓기는 서로간의 적수이지만 결국 찐한 동료가 되는 사이로 변한다. 둘을 최고의 적수라고 꼽는 이유는 적이지만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들을 통해 사나이들만 공유할 수 있는 끈끈한 우정을 담아 냈기 때문이다.


# 4위 : 3:10 투 유마

밴웨이드(러셀크로우) VS 댄 에반스(크리스찬베일)


철 지난 서부영화쯤으로 생각하고 감상한 영화가 대박인 경우다. 사실 러셀크로우나 크리스찬베일의 연기를 하나의 스크린에서 동시에 감상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운인 영화다. 영화 제목부터가 심상치 않은 3:10 투 유마는 3시 10분 유마행으로 향하는 기차에 범죄자 벤웨이드(러셀크로우)를 호송하기 위한 댄에반스(크리스찬베일)의 여정을 다룬다.


한가지 특이한 것은 기존의 서부영화들이 취해왔던 선과 악의 구분자체를 조롱하듯 모호하게 뒤집어 버리는 영화적 설정이지만 긴장감이 느슨하거나 흥미가 반감하지 않게 풀어낸다. 두 적수의 대립관계와 그 속에 그려내는 부성애, 이에 동화되는 악인의 심리묘사가 꽤나 매력적이다. 색다른 서부 활극을 원한다면 3:10 투유마를 선택해도 좋다.


# 3위 : 친구

준석 (유오성) VS 동수(장동건)


2001년 한국은 그야말로 친구 돌풍에 휩싸였다. 곽경택 감독의 친구가 이렇게 파란을 일으킬지는 아무도 예측 못했을 것이다. 2001년 3월 31에 개봉한 친구는 2,579,950명을 극장으로 불러 들이며 같은 해에 개봉한 엽기적인 그녀를 8만여명차로 따돌리며 2001년 의 최고흥행작에 등극한다.


"니가가라 하아이", "고마해라 마이무따 아이가"등의 대사는 각종 패러디로 만들어질 정도로 영화 친구의 흥행은 거침없었다. 오래 두고 사귄 벗, 함께 있을 때 두려울 것이 없는 친구사이인 준석과 동수지만 서로에게 칼을 겨누어야 하는 적이 되는 순간 둘은 더이상 우정어린 사이가 아니다. 준석에 대한 열등감, 친구에 대한 배신감과 반목들을 잘 표현한 유오성과 장동건을 최고의 위치로 끌어준 영화 친구는 오랜 시간이 흘러도 잊혀지지 않는다.


# 2위 : 무간도

진영인(양조위) vs 유건명(유덕화)


2002년 명맥을 겨우 이어가던 홍콩 느와르에 걸작이 한편 탄생한다. 유위강 감독의 무간도. 와이어가 난무하고 천편 일륜적인 스토리에 식상해 있을 홍콩영화매니아들에게 치열한 두뇌싸움, 심리전으로 색다른 신선함을 안겨준다. 홍콩경찰의 비밀 경찰신분으로 삼합회에 잠입한 진영인(양조위)과 반대로 삼합회 소속이면서 조직원을 위한 스파이로 홍콩경찰에 잠입하여 활약하는 유건명(유덕화)의 심리 대결이 압권이다.


진영인은 10년 동안의 삼합회 조직원 생활을 청산하고 떳떳한 경찰 신분을 되찾길 바라고 유건명은 조직의 보스를 제거해 가면서까지 안정된 경찰신분 속에 신분상승을 꿈꾼다. 비슷한 고민을 가진 둘은 서로 가장 위험한 적인 동시에 서로의 아픔을 누구보다 공감하는 동지다.


주연, 조연할 것 없이 적절한 캐스팅과 각본과 시나리오 상상을 초월하는 반전까지 삼박자를 두루 갖춘 영화다. 속편, 3편도 흥행을 이어가며 헐리웃으로 넘어간 판권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잭니콜슨의 "디파티드"로 리메이크 되지만 원작의 발끝도 못 쫓아가는 느낌만 줄 뿐이다.


# 1위 : 다크나이트

배트맨(크리스찬 베일) VS 조커(히스레져)


슈퍼히어로물을 가장한 범죄스릴러. 아니 범죄스릴러를 가장한 장르영화라고 하는 편이 정확하다. 다크나이트를 내가 본 영화 중 최고의 적수가 등장하는 영화 1위로 꼽는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과 고인이 된 히스레져에게 경의를 표한다.


선 과 악의 대결에 항상 선의 입장에 치우쳐 있던 헐리웃의 세계관을 조롱하듯 선과 악 둘 사이의 팽팽한 대립과 대결을 촘촘히 심어 놓는다. 선과 악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미묘한 차이일 뿐, 운명은 이런 선악을 구분 짓는 것처럼 무모한 것임을 수 차례 보여주려 애쓴다.


배트맨은 가장 인간에 가까운 히어로로써 완벽하지 않아 더욱 빛나고 조커는 순수악 그 자체로 섬뜩함과 아찔함을 함께 표현한다. 그래서 둘의 격돌은 치우침 없이 팽팽한 평행선을 그린다. 슈퍼히어로물을 통틀어 이처럼 적수다운 맞대결을 펼친 적이 있었을까. 감히 배트맨과 조커의 영화 속 대결을 최고라 말하고 싶다.


2009년 5월 12일 화요일

[7급 공무원] 제목이 아쉬운 영화.


4월~5월 들어 극장가에 헐리웃 영화들과 대적할만한 영화들이 내걸리고 있다. 애초부터 관심을 모았던 박쥐는 예상대로 흥행1위를 달리고 있고, 그 뒤를 뒤쫓는 한국영화 한편이 있다. 7급 공무원. 사실상 이영화의 경우 개인적으로 예매 우선순위에서 줄곧 밀려 있었다. 제목에서 풍기는 뉘앙스가 자칫 진부한 이류나 삼류 코미디물 정도 쯤에 머물 것이란 예측에서였다.


그 동안 한국영화는 될법한 영화들, 흥행이 될만한 소재들만 긁어 모아서 영화를 만드는 이른바 흥행보증수표급 영화들을 양산해내는데 급급한 경향이 있다. 이러한 제작 풍토에 식상한 관객들은 조폭영화, 뻔한 애정물들을 외면하면서 한국영화에 대한 거품이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고, 극장가는 깊은 불황의 늪에 허덕이기도 했다.


7급 공무원이 그런 전례에 사례를 하나 더보태주는 격이 되지 않을까하는 걱정이 앞서기도 한다. 한국영화치고는 조금 독특한 소재일지 모르겠지만, 어디서 많이 본 영화, 연상되는 영화가 몇몇 있을 정도로 새롭지 않은 영화다. 첩보물이면서 7급 공무원이라는 타이틀을 달게 된 이유가 극 종반에 가서야 이해가 될 정도로 제목에 대한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유쾌하고 즐겁다. 큰 의미를 두지 않아도 되는, 눈이 즐겁고, 마음이 편안한 영화다. 다양한 액션신을 소화해내는데 상당히 힘겨웠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김하늘의 액션은 크고 웅장하다. 하지만 설정자체가 미스터 & 미세스 스미스식 좌충우돌의 스토리를 차용한 듯 하고, 의식적으로 패러디임을 보여주고 한 것인지 가늠할 수 없지만 미션임파서블의 익숙하고 뻔한 반전시퀀스도 새롭지 않고 진부하다.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어리숙한 강지환의 몸짓도 소비적이다.


큰 웃음보다는 키득키득 웃을 수 있는 장면들이 꽤나 많다. 가랑비에 옷이 젖듯이 즐거움이 장기인 영화다. 지인 중에 한 명은 오히려 과속스캔들의 유쾌함보다 한 수 위라는 호평을 하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 취향상의 평가인듯하다. 개봉 이후 박찬욱 감독의 ‘박쥐’를 만난 것이 7급 공무원의 가장 큰 불행이 아닐까.


류승룡, 강신일, 장영남 등 굵직한 조연들의 후광도 영화를 뒷받침한다. 강지환과 류승룡 덕분에 아무 생각 없이 신나게 웃다가 극장을 나올 수 있었다. 벌써부터 속편을 기대하는 글들도 간간히 보인다. 만일 속편이 나오게 되면 연재물의 제목은 6급…5급….4급 공무원이 될까. 과연 속편을 염두에 두고 영화제목을 지었던 것일까. 이런 저런 생각에 휩싸이게 하는 영화. 7급공무원은 유쾌하지만 뭔가 2%정도 부족한 중박 정도의 영화로 기억될 것 같다.



[비트] 추억의 영화 비트 (Beat 1997)



"나에게 꿈은 없었다." 정우성의 나즈막한 나레이션으로 박동하는 젊음의 영화 '비트'는 시작된다.


대학시절(97년)시절 본 영화 한편이 아직 마음 깊이 남아있다. 김성수 감독, 정우성, 고소영 주연의 비트. 사실 만화가 허영만의 원작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지금은 식객, 타짜 등 허영만 원작의 만화들이 빈번하게 극장에 걸리긴 하지만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사례였다.


'젊음'이라는 코드, 질풍노도의 반항적이고 거침없는 일탈을 스타일리쉬하게 그려냈고 우정과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는 캐릭터를 묵묵하게(?) 소화해낸 정우성의 초기작으로 유명하기도 하다. 무명 정우성을 일약 스타덤에 올려 놓은 역작인 비트는 아쉽게도 김성수감독의 마지막 흥행작이 되고 만다.

말보로 담배와 지포라이터는 반항의 아이콘이 되었고 편곡된 비틀즈의 Let'it Be는 늘 귀에 이어폰을 꽂고 흥얼거릴 정도로 익숙한 노래가 되었다. 탈줄 모르는 오토바이에 대한 전문잡지를 정기구독하게 만들었던 비트. 김부용의 특유의 컬컬한 목소리가 담긴 비트 주제곡은 나의 18번이 될 정도로 영화 비트의 매니아가 되었다.


정우성의 상대는 고소영이 맡았고 유오성과 임창정도 이 영화로 이름을 알렸다. 특히나 단역을 주로 맡았던 임창정이 엑스트라 인생에 종지부를 찍고 오늘날의 임창정으로 거듭나게 해준 영화 역시 다름아닌 '비트'였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말죽거리 잔혹사와 같은 학원 액션영화의 원조격인 영화가 비트라 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Beat 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박동하다' , '두드리다' 정도가 나온다. 일탈을 꿈꾸는 젊음을 표현하는 단어다. 스스로 세상의 중심이고 싶었지만, 삶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는 무미건조한 젊음이지만 끊임없이 세상을 향해 두드리는 청춘의 모습이 내 모습인양 측은해 더욱 공감이 갔던 영화다.



정우성은 비트이후에도 늘 비트속의 '이민'(극중배역)으로 살아간다. 본인의 굳어진 캐릭터를 단번에 깨뜨리기 위한 노력이 엿보였던 '똥개' 이전까지 후속작들 모두 이민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 영화의 흥행덕택에 정우성과 고소영은 '러브'라는 멜로물로 다시 호흡을 맞춘다. 비트에 비해선 비중있는 대사들이 제법 많았지만 전작의 이미지가 고스란이 남아있는 마라토너 정우성은 비트만큼의 임팩트를 주지 못한다. 개인적으로 정우성이란 배우에 애정을 가지고 있지만 좀처럼 늘어나지 않는 연기력의 한결같음은 늘 아쉽기만 하다.


2009년 5월 11일 월요일

[박쥐] 인간의 욕망과 나약함을 비트는 박쥐.



4월 30일 이미 개봉에 맞춰 박쥐를 본 사람들의 반응들을 살피고 극장을 찾은 탓일까. 놀라울 것도 새로울 것도 없는 느낌이 우선 밀려왔다. 대게 영화를 보고 나면 머리 속에 영화에 대한 전반적인 생각과 느낌이 묻어 나오기 마련인데, 박쥐만큼은 어지러움을 느끼게 해준다. 영화의 스토리가 끊어질 듯 이어지고, 이어질듯하면서도 난해한 이유도 있었겠지만, 영화 속에 표현된 몇몇 배우의 표정들이 영화가 끝나고도 내내 잊혀지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 박쥐의 핵심 키워드는 두 가지인 듯 하다. 뱀파이어 그리고 종교. 여기에 한가지 더 보태자면 인간의 욕망과 믿음, 이를 둘러싼 인간들의 내면에 투영된 모습들을 오밀조밀하게 비춘다. 뱀파이어를 소재로 한 영화치고는 매우 무겁고 섬뜩한 장면들이 펼쳐진다. 박찬욱 감독 특유의 불친절한 편집도 군더더기 없는 전개에 속도와 흥미를 더한다.



많은 사람들이 기대 이하의 영화에 혹평을 더하고 있고, 영화가 종료된 후 관객들의 반응도 냉담했지만 개인적으로는 뱀파이어라는 상투적인 소재를 가지고, 인간의 욕망 가운데 내재된 다양한 심리들을 끄집어 낸 것만으로도 충분히 높은 평가를 해주고 싶은 영화다.


초반에 극 전개에 대해서는 박찬욱 감독의 기존영화에서 줄기차게 표현된 복수코드의 연장선상이 아닌가 싶은 느낌이 들었지만, 반전을 통한 전개등을 미루어 짐작컨데, 복수와 거리가 먼 캐릭터의 변화무쌍함 정도라고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이 깊었던 것은 많은 언론에서 기사화 된 송강호의 노출신과 김해숙(태주 시어머니 역)의 잊혀지지 않는 표정(머리가 쭈뼛할 정도), 그리고 박인환(노신부 역)의 연기다. 물론 때론 귀엽기도 하고, 섬뜩하기도 하며, 어리숙하지만 팜므파탈적인 모습을 천역덕스럽게 표현해 낸 김옥빈도 높이 평가하고 싶다.


박찬욱 감독이 비틀고자 한 현실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죽음 앞에서 죄를 사하고, 인도받기를 원하는 인간의 나약함, 신에 대한 믿음은, 본능 속에 억제된 쾌락과 욕망이 쉽게 깨어지는 유리와도 같음을 보여준다. 결국 인간의 욕망은 나약함 앞에 한 없이 깨어질 수 밖에 없는 인간본성의 한 단면인 셈이다. 박쥐를 통해 이를 여지없이 보여주는 감독특유의 재치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결말이 꽤나 유쾌하다. 유쾌하다는 표현보다는 익살 맞다. 욕망의 종착역은 결국 빛 앞에 흩어지는 먼지와 같다. 어둠이 걷히고, 여명 끝에 흩어지고 사라지는 욕망은 결국 인간본성이 돌아갈 곳이다. 영화는 끝이 났지만 어지러움 속에, 긴 여운이 남는 것도 나약함 속에 오랜 잔상으로 남아있는 영화 곳곳의 헛된 욕망 때문이 아닐런지.




[피스트오브러브 단평]어른들의 사랑이라는 성장통.




피스트오브러브는 사랑에 관한 영화다. 잔잔하지만 흡입력 있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모건프리먼의 캐릭터는 영화마다 비슷한 느낌이다. 좀처럼 변함이 없다. 대게 안온하고 넉넉한 이미지. 피스트오브러브에서도 전작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그럼에도 식상하거나 거부감이 들지 않는 건 배역에 스며든 그의 연륜 때문이다.


영화는 지역 대학교수인 해리스티븐슨(모건프리먼)의 시선에서 관찰하는 사람들의 사랑을 다룬다. 사랑은 4가지 형태의 각기 다른 모습으로 얽혀 있다. 부모, 연인들, 아내를 레즈비언에게 빼앗긴 억세게 운 나쁜 남자와 유부남을 사랑한 여자까지 다양하게 망라한다.


그 중 특히 해리스티븐슨(모건프러먼)의 상처와 이를 치유해가는 과정이 특히 인상 깊다. 해리스티븐슨 교수는 아픔이 많은 사람이다. 헤로인과다로 아들을 저 세상으로 일찍 보낸 데 대한 죄책감이 가슴 한구석 깊은 무게감으로 짓누른다. 사람들에게 조언을 해주는 소일거리로 보내는 시간외엔 늘 그런 죄책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질긴 기억의 파편들을 덜어내기에 현실은 그리 녹록치가 않다.


그래서 해리스티븐슨 교수의 삶은 자체로 온전하지 못하다. 아득하게 먼 길을 굽이 돌아온 듯 주름이 깊게 패여 버렸고 군데군데 검은 딱지가 근심마냥 얼굴너머 그득하다. 위안은 늘 곁에 두고픈 아내와의 와인한잔과 사랑으로부터 방황하는 주변인들을 달래주고 치유하는 일이 고작이다.


주변인들이 겪는 사랑에 대한 관찰은 그래서 그에게 의미 있다. 관찰자체가 삶의 구비구비 사람과 사람사이에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인데다가 종극에 이르러 가족이라는 새로운 연결고리의 구실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에피소드는 대게 운명에 초점이 맞춰진다. 영화 속에 거론되는 운명의 실체는 무기력한 우리 인간에게 너무나 가혹한 깨달음을 안겨준다. 결국  어른들의 사랑은 성장통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운명에 겸허할 줄 알고 상대의 입장에서 눈을 뜨는 방법등을 가르친다. 그 순간이 비로소 그들을 억압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결 론으로 귀결된다.


아늑하면서 아득하고 지루하지 않으면서 매끄럽다. 색이 밝다. 아니 푸르다는 표현이 오히려 정확할지 모르겠다. 좋은 느낌의 향이 난다. 사랑에 대한 작은 진리하나를 체득하고 싶다면 영화를 추천한다.

2009년 5월 10일 일요일

[용의자 X의 헌신] 스릴러를 뛰어 넘는 역작.




일본의 인기 드라마 ‘갈릴레오’를 원작으로 하는 용의자x의 헌신은 제목자체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탄탄한 시나리와 극적 반전은 올해 본 스릴러물 중에 단연 최고라 꼽을만하다.

 

용의자


<묘한 표정의 츠츠미신이치의 장면이 기억에서 오래 머문다>

 

영화의 재미는 줄곧 ‘어떻게’라는 물음을 던져준다. 의도하지 않은 살인사건에 휘말린 이웃집 모녀<야스코>를 위해 옆집에 홀로 사는 천재 수학자 <이시가미>가 생각해낸 것은 살인 사건 당일의 알리바이를 완벽하게 구성하는 것이다. 평소 고등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는 <이시가미>는 논리적인 사고와 상황판단으로 경찰이 제시하는 물음들에 대한 알리바이를 면밀하고 치밀하게 준비함으로써 수사팀을 곤욕스럽게 한다. 하지만 학창시절 최고의 라이벌이었던 물리학자 <유카와>교수가 수사에 참여하게 되면서 쉽게 마무리 될 것 같던 완전범죄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사실 둘 사이의 미묘한 감정선의 대립과 승부욕에 대한 부분은 영화를 전개하는 핵심이 아니다. 헝클어지고 한데 꼬여버린 사건의 실마리 뒤에는 반복된 삶, 무기력하고 무미건조한 삶을 포기하고픈 한 사내의 무기력한 삶이 있다. 살아야 할 이유를 잃어버리고 차가운 도시에 표류하는 일상에 구원의 손길을 건낸 <야스코>를 향한 마음이 영화의 주축이다.

 

용의자2  용의자3

 

스릴러에 갑자기 왠 생뚱 맞은 사랑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사랑이라는 핵심을 제외하고서는 영화를 이야기 할 수 없다. 한 사람을 향한 사랑, 가족에 대한 염원과 따뜻한 삶에 대한 희망들이 사건의 이면에 흐르는 극적 반전의 원류인 셈이다.

 

이쯤 되면 ‘어떻게’란 물음이 ‘어째서’라는 물음으로 뒤바뀐다. 사실상 영화는 처음부터 범인을 명확하게 노출하고, 뒤에 벌어진 과정들을 철저하게 숨겨버린다. 관객들을 줄곧 사건을 추론하고 추리하게끔 만들지만 사건의 실체에 대해서는 그 내용을 명확하게 사실화하지는 않는다. 수사팀과 <유카와> 교수가 실마리를 풀어나가는 과정들을 비춰가면서 실제 그 안에 숨겨진 복선과 의미들을 하나 둘 끄집어 낸다.

 

하지만 이런 사건의 진실도 영화 속에는 중요한 부분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는데 이는 <이시가미>와 <유카와> 교수사이의 대화 ‘그 문제를 푼다해도 아무도 행복해 지지 않아...란 대사 속에 잘 녹아 있다. 그리고 감독은 애초 관객을 통해 제시한 문제들을 ‘사건에 국한해서 접근하지 말고, 모든 관점을 바꾸어서 살펴볼 것을 진지하게 이야기한다.

 

기하문제로 보이지만 알고 보면 함수 문제라는....관점을 바꾸면 풀 수 있다...

 

모든 해답은 영화 속에 들어 있다. 하지만 그 관점에 대한 명확한 해답을 제시하지는 않고 줄곧 관객의 상상의 끄집어 내는데 많은 공을 들인다. 그래서 영화 속의 한 장면 한 장면을 놓치지 않고 몰입할 수 있다. 영화 초반에는 <이시가미>의 논리적인 추론과 치밀함에 놀라고, 후반에 가서는 ‘어째서’라는 물음에 대한 해답을 관객 스스로가 찾을 때쯤 기존의 스릴러물이 머무를 수 밖에 없었던 단편적인 반전 이상의 감흥에 무릎을 칠 수 밖에 없는 영화다.

 

해답을 거부하고, 얼마든지 사건에 대해 추론할 수 있고, 정답을 제시할 수 있지만 그것 역시 본질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단지 <야스코>를 위해 희생할 수 있다는 삶의 또 다른 의미를 찾게 해준 은인에 대한 헌신으로 자신의 삶이 한층 의미를 더해간다는 사실은 마지막 <이시가미>의 억척스런 눈물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