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2월 7일 월요일

엘르엣진/ 시험보는 것보다 여자친구 선물 고르기가 더 어려워

시험보는 것보다 여자친구 선물 고르는게 더 어렵다. 꼭 집어서 내가 사줄 수 있는 것으로 말해주면 좋을 텐데, 도데체 어떤걸 받고 싶은건지 잘 모르겠을 때 엘르엣진에서 답을 얻어보자.




대부분 여자들은 호불호가 매우 확실하기 때문에 선물을 고르기가 훨씬 더 어렵고 걱정이 앞선다.
이럴때 주위에 도움을 요청해 보지만, 취향이 다 다르기 때문에 더 헷갈리기만 한다.
내가 사기에는 돈이 아깝지만 받을 때 기분 좋은 패션 소품을 선물로 준비하는 것이 좋다.


이해하기 어렵다고?
그럼 꽃다발을 생각해보자. 내가 내 돈주고 사기는 아깝지만, 여성들은 받으면 매우 기분 좋아한다.
그날 하루는 정말 나에게 무한한 사랑을 주기도 하지 않나?


패션 소품은 연령대나 스타일에 관계없이 무난하게 매치가 가능한 것으로 고른다.


다행히 겨울에는 다채롭고 실속있는 패션 소품이 많아 선택의 폭이 넓다.


올 겨울은 특히 퍼(=털) 소재가 유행이므로 선물을 고를 때 이점을 염두해 두자.
퍼 머플러나 넥워머 등의 패션소품은 겨울 외투에 걸치는 것만으로도
한결 고급스러워 보이는 패션을 연출할 수 있다.


또한 인터넷 기사에서 봤는데 퍼 소재가 주는 포근함과 사랑스러움은 모든 여성들의 로망이라고 한다.
연말 파티 웨어로도 활용할 수 있어 만족감과 실용성을 한꺼번에 충족시켜주는 베스트 아이템이라
센스있는 남자친구임을 뽐낼 수 있다.


이런 것도 어렵다면 머플러나 장갑을 마련해라.
머플러나 장갑 등은 겨울철 필수 아이템인데다가 적절하게 매치하면 스타일리시해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독특한 패턴을 가지고 있거나 여러 컬러 배합으로 시크한 느낌을 주는 머플러를 선물한다면 당신은 이미 센스남


기본적인 아이템인 모자


다양한 모양과 색상의 장갑




분위기 있는 연출을 위한 머플러




울 소재의 니트


청순 큐트의 대명사 머리띠




여자들의 필수품 향수

2009년 6월 17일 수요일

[호타루] 패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전쟁의 역사.



우리에게 철도원으로 익숙한 후루하타 야스오 감독의 <호타루>는 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다. 호타루는 <반딧불이>를 의미한다. 죽어서도 반딧불이가 되어 고향을 찾겠노라는 젊은 군인들의 바람을 담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포스터에서 나와 있는 카피 "2년만에 다시 찾아온 눈물과 감동"은 철도원의 흥행과 감동을 어떻게든 이어가보려는 마케팅적 노림수로, 영화를 보고 나면 적지않은 어색함을 느끼게 된다. 호타루는 철저하게 승리국의 입장에서 해석된 전쟁영화와 달리 패전국의 담담함을 진지하게 담아냈다.

전쟁을 다루는 수 많은 영화나 영상에서 승리와 패자는 곧 선과 악으로 치환되곤 한다. 예컨데 조성모의 뮤직비디오 [아시나요]를 보더라도 이런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극적인 요소, 긴장감을 위해서 묘사되는 베트남군의 모습은 하나같이 험상궂고, 약탈과 폭행을 일삼는 미개인처럼 그려진다. 반대로 미군과 한국군은 정의를 수호하고, 약자를 돕는 선한 캐릭터로 그려진다. 역사가 승리한 자들의 관점에서 작성된 편파적인 기록인 것처럼 감성을 자극하기 위한 캐릭터 설정은 종종 역사적 사실 혹은 진실과는 관계없이 묘사되기도 한다.

 


호타루는 그런 측면에서 반대의 경우, 패자의 입장에서 전쟁을 바라보는 시선을 체험할 수 있다. 2차세계대전에서 패전국인 일본의 입장을 대변하듯, 일본인들의 전쟁 이후 모습들을 그린다. 목숨을 걸고 전쟁에 참여할 수 밖에 없었던 학도병의 정당성과 가미가제로 대표되는 자살특공대를 애국심으로 미화하는 방식은 마치 승자가 역사를 자랑스런 전유물로 인식하는 행위와 닮아 있어 불편하다.



하지만 헐리웃의 휘발성 강한 전쟁영화들처럼 적국이나 제 3국을 철저하게 타자화하면서까지 자국의 역사를 미화하지는 않는다. 전쟁의 승리를 위한 조선인의 징집에 대해서 미흡하나마 사죄의 의미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전범으로써의 천황의 의미를 재해석하는 대사들도 주목할만하다.. 한국인의 입장에서 불편한 진실을 자극하지 않고, 일본의 전쟁에 부득불 희생양이 될 수 밖에 없는 상황들을 연출함으로써 일본인 관객과 한국인 관객을 동시에 의식한 듯한 장면들도 눈에 띈다.

호타루에서는 의외로 반가운 얼굴도 볼 수 있다. 한국에서도 한때 청순한 이미지로 사랑을 받았던 일본출신 배우 유민이 도모코의 젊은 시절을 짧게 나마 연기한다. 일본의 국민 배우, 다카쿠라켄 역시 편안하면서도 안정적인 역활을 소화하며 영화를 더욱 빛내주고 있다.

유민

전우들과 함께 장렬히 최후를 맞이하지 않고 살아 남은 참전자, 늘 떳떳하지 못하고 짐을 지고 사는듯 가슴 한구석이 답답한 후지에와 조선인 선임병의 마지막 유서를 전하기 위해서 한국행을 자처하는 야마오카와 도모코는 전후 일본세대의 상처를 여실히 보여준다. 영원히 치유될 수 없는 전쟁의 상처보다 더욱 깊은 아픔은 결국 사람들의 마음 속에 각인된 전쟁의 허무함이 아닐까. 반전과 평화 그리고 용서라는 키워드를 적절하게 녹여냈을 뿐만 아니라 패자의 입장에서 바라본 전쟁의 의미와 일본의 슬픈 현실들이 모두 포함된 영화가 바로 호타루다.

2009년 6월 16일 화요일

[콰이강의 다리] 집착이 만들어낸 웃지 못할 해프닝.

콰이강의 다리

영화 콰이강의 다리는 1957년 작품이면서 전혀 구시대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작품이다. 2차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들과는 달리 인간의 잔혹상이나 전쟁의 상흔을 표현하는데 시간을 할애하지 않고서도, 인간내면의 변화과정을 디테일하게 담아냈다. 

영국에서 만들어지고, 영국인의 시선에서 그려져서인지 일본인(사이토대령)은 우둔하고, 비합리적으로 그려지긴 하지만 이는 영국공병대장 니콜슨 대령의 군인 정신과 리더십을 상대적으로 부각시키기 위한 배치로 생각할 수 있다.

니콜슨 대령은 철저하게 원칙주의자다. 한번 품은 의지는 절대 굽히지 않는 소신있고, 기개있는 장교로 그려진다. 일본군 수용소장 사이토에 맞서 제네바 협정상 장교의 노동금지를 주장하다가 한달간 독방신세를 지지만 절대 타협하지 않는다.



결국 의지가 승리의 결실을 이루고 장교들은 콰이강 다리건설의 관리직으로만 참여한다는 약속을 얻어낸 니콜슨 대령은 영국인의 기상과 우수함을 사이토대령에게 과시하기 위해서 급격하게 변화한다. 이적행위를 하지 않아야 할 장교가 적국의 보급로가 될 다리 건설을 주도적으로 이끌고 있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연출된다.

영화는 여기에 머물지 않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인간의 집착에 초점을 두기라도 한듯, 니콜슨 대령을 더욱 악착같은 인물로 변화시킨다. 공기 단축을 위해 환자병들까지 동원하고, 다리개통과 더불어 급파된 영국 특공대원들과 맞써서 자신의 다리(?)를 지키려하는 웃지 못할 해프닝이 벌어진다.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지?

마지막 니콜슨 대령의 자조적 한마디로 사태를 되돌리기엔 너무 늦어버렸다. 원칙을 고수하고, 당당한 리더십이 정복해야 할 대상을 굴복시키기 위해 벌이는 집착과 광기는 인간 본성의 악랄함과 어리석음을 여실히 드러내며 다리와 함께 무너져 내린다.

영화 자체가 아주 오래 되었고, 제법 긴 런닝타임에도 불구하고 지루하지 않은 것은 일본군 사이토대령과 니콜슨 대령과의 자존심 싸움이 내내 흥미진진하고, 다리가 완성되어가는 과정, 다리를 폭파하기 위해 급파된 특공대원들 사이의 스토리가 서로 이질감 없이 돌아가기 때문이다. 명작감독으로서의 저력이 새삼 놀라운 영화다.

2009년 6월 15일 월요일

[시선 1318] 10대를 바라보는 색다른 시선들.



시선 1318은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10대 청소년을 바라보는 각기 다른 관점이다. 5명의 감독이 풀어낸 이야기는 시험 스트레스 문제, 미혼모 문제, 미래에 대한 불안과 답답함, 청소년의 시각에서의 청소년 문제, 다문화 가정의 인권문제 등을 이야기한다.


[진주는 공부 중] 방은진 감독.
옴니버스 영화답게, 취향에 맞게 골라 볼 수 있는 다양성이 있다. 첫번째 단편은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자연법칙을 어릴적부터 체득하고 있는 청소년의 슬픈 단면을 가장 밝은 화면 안으로 담아낸 이야기 <진주는 공부 중>이다. 한편의 뮤지컬을 편안하게 감상하는 느낌으로, 제도권 교육안에서 진정 하늘을 날고 싶은 욕망을 억압받는 아이들의 모습이 슬프지만 화면에서 만큼은 유쾌하게 그려진다. 남지현, 정지안 두 배우의 노래와 율동도 내내 기억에 남는 영화다.


[유.앤.미] 전계수 감독
총 5편의 단편 중에서 가장 시각적으로 편안한 느낌이다. 하지만 영화 자체는 그리 안정적이지 않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 역도 이외의 다른 꿈을 상상할 수 없는 현실에 놓인 아이와 내 의지대로 현실을 살지 못하는 아이의 고민은 비단 영화 속 아이들의 고민만은 아니다.  그래서 우울하고 건조할 수 밖에 없는 물이라도 한차례 뿌려 차오르는 바다만큼의 꿈을 느끼고 싶은 아이들의 바람이 담긴 영화이기도 하다.


[릴레이] 이현승 감독
릴레이는 청소년의 임신문제를 특이한 관점에서 접근한다. 왜 학생은 아이를 키우면서 학교에 다닐 수 없느냐를 반문하는 당돌함이 보편적인 통념과 이질감을 느끼게 한다. 그럼에도 일견 그들을 보듬고 보호하기 보다는 차가운 현실로 내모는 기성세대와 사회는 우리 스스로 한번 돌아보아야한다는 자성적 메세지를 은유한다. 박보영이 등장으로 업된 기분과 문성근의 "이것이 알고 싶다"를 연상케하는 장면이 마냥 웃음으로 머물지 않은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청소년 드라마의 이해와 실제] 윤성호 감독
제목부터가 심상치 않은 영화는 5편 중 가장 색다르다. 색다름의 의미는 짜여진 각본과 가지런한 대사없이 즉흥적으로 이뤄진 비트박스와 자막 속에 잘 드러난다. 대선 벽보를 뒤로 한 화면 안에서 주저리 주저리 이뤄지는 대화는 갈피를 잡지 못할 정도로 중구난방이지만 그 속에 현실에 대한 그리고 미래의 꿈에 대한  생각이 엿보인다. 실제 10대 청소년이 직접 각본에 참여해서 만들어 나간 영화는 가장 자유발랄하고 형이상학적인 한편의 단편으로 거듭났다.


[달리는 차은] 김태용 감독
다문화 가정의 현실과 문제에 대한 진지한 접근이 돋보이는 영화다. 2005년 기준 국내 초중고 혼혈 학생은 약 6천여명, 중학교 학업 중단율이 17.5%라는 점을 놓고 보더라도 우리사회의 다문화 가정에 대한 문제는 흘려버릴 수준을 넘어섰다. 김태웅 감독은 다문화 가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소외와 외로움에 대해 감독 특유의 정서를 담아냈다. 현실을 도피하고 싶어 마냥 달리는 차은과 한국인도 필리핀인도 될 수 없는 차은 엄마는 서로 닮아있지만 외로움을 보듬어 줄 수 없는 사이다. 엄마와 딸이라는 정서적 교감이 서로를 끌어안을 때에 비로소 서로에게 평행을 달리는 마음이 열고, 서로를 끌어안은 따뜻함을 느낀다. 다문화 가정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그 속에 소외된 소수자들에 대한 한없는 따뜻함을 느끼기에 충분한 작품이다.




2009년 6월 9일 화요일

[마더] 모성애의 집착 + 섬뜩한 복수극.


모성애의 집착과 아들의 섬뜩한 복수극.


사랑이 지나치면 집착이 되고, 집착이 강해지면 비극이 된다. 비단 남여사이의 사랑에 국한되는 문제는 아니다.

한번으로 의문이 풀리길 기대한 것 자체가 무리였다. 마치 엉킨 실타레가 잡고 있는 기분이다. 그래서 또 한번 극장을 찾았다. 예상대로 곳곳에 놓치고 지나간 부분들이 스며나왔다. 하지만 수수께끼처럼 복선이 새로운 연결고리와 함께 엉켜버렸다. [오죽했으면 감독조차 이제는 말할 수 있다며 인터뷰를 한 것일까]

마더는 애초에 상상력을 제한할 의도가 없는 것처럼 세밀한 상징적 암시들이 빼곡이 들어 차있다. 모성애가 진화한 집착과 광기가 어머니라는 이름을 끝을 알수 없는 곳까지 데려 놓는다. 더불어 '복수'라는 키워드가 마치 날카로운 칼마냥 모성애의 집착, 광기와 만날 때 세상에서 가장 섬뜩한 영화가 되었다.

인상적인 장면들과 상징적 의미들.

#1 춤.
관객에 따라서 처음 김혜자의 춤은 <웃음> 아니면 <궁금증>으로 다가온다. 내 경우 첫 느낌은 웃음 쪽에 가까웠다. 깊은 의미를 두기보다 어떤 설정이나 환기차원의 배치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 후반, 그리고 종반 보기 좋게 걷어차인 느낌을 받는다. 춤은 사건이 절정으로 치닫고, 모든 진실이 어머니의 가슴에서조차 쓸어내릴 수 없는 지경에 다다를 때, 유일하게 자신을 자각하는 방법인 동시에 지우고 싶은 기억에 대한 몸짓이 된다.

#2 손.
인간 대부분의 행위는 손에서 비롯된다. 선행도 악행도 손의 힘을 빌어 이뤄진다.
날카로운 작두에 얹은 손이 위태할 때 마다 관객은 마음을 졸인다. 피가 흥건한 채로 억척스럽게 아들을 향해 돌진하는 어머니의 손은 아들을 보듬기도 하지만 결국 제어할 수 없는 광기를 뿜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영화 초반 타이틀 씬에서 김혜자가 옷깃으로 집어 넣은 손은 집착, 광기를 모두 숨기고 있는 모습처럼 보인다.(정확히 두번째 볼 때 그런 느낌이 강했다). 그래서 더욱 처량하고 한편으론 섬뜩하다. 

#3 오줌.
물가에 내어 놓은 것 마냥 늘 걱정인 아들. 담벼락에 오줌을 싸지르는 아들을 지켜보는 어머니의 시선 하나도 예사롭지 않다. 한약을 입에 넣어주고, 아들이 남긴 흔적을 뒷처리하는 모습은 모자사이의 사건들을 암시하는 것 같아 그냥 흘려버릴 수 없다.

#4 사진.
도준의 기억이 고스란이 묻어있는 한장의 사진. 가장 미스터리한 소품 중에 하나다. 기억에서 도려내고 싶은 부분이 있어서 일까. 아들만을 생각하는 모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표현이었을까. 아직까지 결론내릴 수 없는 장면 중의 하나다.

#5 꽝~복수!
두번째 관람이후 도준의 행동하나하나가 나름의 이유로 다가왔다. 벤쯔 빽미러 사건(?)이후 반복되는 도준의 대사 <꽝~ 복수>는 도준이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되찾고 복수를 꿈꾸기 시작한 터닝포인트 처럼 느껴졌다. 면회실을 사이에 두고, 기억의 끝을 잡고 있는 아들에게 내뿜는 괴성은 전기충격을 받은 듯한 전율을 느끼게 해준다.

#6 3천원
봉준호 감독은 <살인의 추억>이나 <괴물>에서 그랬던 것처럼 마더에서도 사회 언저리의 슬픈 현실을 조목조목 짚어내는 눈을 가졌다. 원조교제, 청소년 폭력, 골이 깊은 제도권의 부패들, 건조하고 때론 습하기도 한 화면 가득한 인간 군상들의 일그러진 현실이 영화 곳곳에 닿아 있다.

아무도 믿을 수 없고, 손을 내밀 수 없는 상황 속에 놓인 어머니. 형사 제문의 우산도 뿌리치고, 빗속을 걸어나간다. 빗 속에서 고물상 노인의 우산을 낚아채고 3천원을 건내지만, 정당한 댓가 이상의 2천원은 다시 어머니에게로 돌아온다. 가장 정당한 것은 빗줄기가 거세기만 한 길바닥에서의 초라한 자신뿐이다.

#7 침자리
고통을 잊게 해준다는 침자리. 보호하고 싶고, 늘 보듬고 싶은 아들 탓에 제어할 수 없는 본능을 드러내 버린 한 사람. 이젠 되려 자신의 기억을 모두 지우고 싶다. 그것이 결국 이 시대의 우리의 어머니가 아닌가라는 물음을 던져주듯 혼란스런 화면으로 영화는 끝맺음을 한다.

2009년 5월 27일 수요일

[보이 A] 오해와 편견이라는 사회적 폭력의 무서움.


보이 A는 폭력에 대한 영화다. 몸에 피멍이 들고, 살이 찢겨 나가게 만드는 물리적인 폭력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힘으로 서서히 인간을 파멸에 이르게 하는 잔인함에 대한 기록이다.

영화는 10세의 어린나이에 친구와 함께 우발적으로 끔찍한 살인을 저지른 범죄자가 14년의 교정기간을 거쳐 사회로 돌아왔을 때 내 주변에 그를 들여 놓을 수 있을 것인가라는 작은 물음으로 시작한다. 물론 씻을 수 없는 과거에 대한 후회와 반성, 속죄의 마음들. 어두운 과거를 딛고 새 삶을 살아가기 위한 한 젊은이의 노력과 꿈을 장시간 풀어 놓는다.


잊고 싶은 기억, 씻고 싶은 과거의 굴레를 벗어던지기 위해 에릭은 잭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고 새출발한다.  마음 한구석 불안한 심리를 대변하듯 악몽에 시달리는 날들이 이어지지만 보호 감찰사 테리의 도움으로 새로운 직장과 친구, 애인까지 생기게 되면서 잭의 일상은 평탄하게 흘러간다. 운 좋게 교통사고를 당한 어린아이를 구출하면서 지방신문에 대서특필되며 영웅으로 거듭나기도 한다.

하지만 늘 가슴 한구석 낙인 찍힌 범죄자의 이름은 지워지지 않는 슬픈이름, 살인마 에릭을 사회적 오해와 편견이라는 폭력의 한가운데로 몰아 넣는다.

<보이 A>는 영국 범죄사상 가장 충격적이고 슬픈 사건으로 기록된 <제임스 버거> 사건을 통해 제기된 영국의 소년범죄 문제를 다룬 원작소설을 기반으로 한다. 속죄와 용서라는 큰 틀 안에 소년범죄자들을 바라보는 영국사회의 편견과 오해들을 정면으로 고발하고 있는데, 영화 속 재판과정에서 검사가 배심원을 향해 내뱉는 독설은 사회가 소년범죄자를 바라보는 차가운 시선을 표현하고 있다.

소년범죄자에게 중형을 내려야 하는 이유는 이들을 교정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우리의 아이들을 악(devil)으로 부터 보호하고, 격리하기 위함이다.

존 크로울리 감독은 이러한 편견을 우회적으로 반박하기 위해서 영화 속 잭의 일상 속에 과거를 교차 편집하는 방식을 선택하고 있다. 어머니가 암투병 중이고, 담배에 쩔어 지내는 아버지는 애정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 볼래야 볼수 없다. 무관심,애정결핍으로 일그러진 잭의 유년기는 늘 외롭기만 하다. 끔찍한 살인의 주도적인 실행자인 잭의 친구, 필립 역시 형의 폭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올바른 인성과 가치관이 채 성립되기 전에 겪어야할 문제들을 보듬어 줄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적 배경을 이해하지 못하고, 결과론적인 범죄행위의 사실관계에 입각해서 범죄의 경중을 판단하는 영국사회의 슬픈 단면이 영화 속에 들어있다. 이는 비단 영국사회의 문제에만 국한되는 상황은 아닐 것이다. 우리사회의 현실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에 더욱 공감이 간다.

잭이 새로운 삶에 정착할 수 있도록 그토록 온정을 쏟아 붓는 보호감찰사 테리 역시 아들에게는 온전한 애정을 베풀지 않는다. 
테리의 아들은 관심과 사랑을 누리지 못해 무기력한 삶, 방황하고 저항하는 태도로 일관하는 캐릭터로 그려지면서 소외받는 청소년의 슬픈 현실을 더욱 강조하고 있는듯 하다. 사실 이부분이 아이러니 한 부분이긴 하는데, 우리가 범죄로부터 약자를 보호하고, 정의를 세우는 일이 중요하다고 외치지만 정작 보호와 관심이 필요한 대상을 돌아보고 있지 못한 것은 아닌지를 우회적으로 꼬집는 듯 느껴졌다.

살인자 에릭이 다시 살기 위해 선택한 이름 잭은 결국 지워지지 않는 슬픈 이름으로 돌아오고 만다. 약자를 구원하지 못하고, 보호해야 할 이름들을 지켜주지 못하는 오해와 편견은 분명 거대한 사회적 폭력이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 쳐 놓은 울타리 안의 무관심 그리고 그로 인해 상처받고, 고통받는 우리현실의 가장 슬프고도 처연한 이름이 바로 보이 A다.



1. 잭버리지 역의 앤드류가필드는 표정 속에 천진난만함과 불안함, 혼돈과 분노를 차례로 녹여내는 재주가 돋보인다.

2. 실제 영화는 1993년 영국을 흔들었던 <제임스 버거>사건을 다른 시각으로 그려낸 수작이다.

3. 시네아트 광화문에서의 관람은 언제나 영화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관객들이 많아서 즐겁다. 어떤 영화든 엔딩크레딧 이후 자막이 모두 올라가기 전에 자리를 뜨는 관객이 단 한명도 없었다.


4."절 구해주셔서 감사드려요.아저씨는 칼을 든 천사에요." 라는 편지 부분은 특히나 마음을 짠하게 만든다.

2009년 5월 26일 화요일

[렛미인] 왕따 소년과 뱀파이어 소녀의 몽환적 이야기.


색다른 뱀파이어 영화 렛미인.
종종 같은 소재의 영화지만 색다른 영화가 있다. 뱀파이어를 소재로 하고 있지만 전혀 뱀파이어 영화같지 않은 영화. 하지만 뱀파이어 영화의 색을 고스란이 담아낸 영화가 렛미인이다. 스웨덴 작가 욘 린퀴비스트의 베스트셀러 <Let the Right One In>을 각색한 <렛미인>(Let Me In)은 초대받지 않으면 결코 인간의 방에 들어올 수 없는 뱀파이어의 속성에서 가져온 제목이다.

최근 뱀파이어를 소재로 박찬욱 감독의 '박쥐'도 화제를 불러오고 있지만 오히려 렛미인을 더욱 높이 평가하고 싶다. 기존 뱀파이어 영화의 서사적 구조는 피를 갈구하는 뱀파이어를 통해 인간내면의 욕망과 타락, 혼돈을 주로 묘사한다. 의례적으로 뱀파이어에 대항할 나무 말뚝이나 마늘 등이 등장한다. 대게 영화의 초점이 이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경향이다. <렛미인>은 그 시작부터가 다르다.


<렛미인>에서 뱀파이어는 귀여운 소녀다. 창백한 얼굴의 수수께끼 소녀 이엘리가 그 주인공이다. 이엘리의 아버지[footnote]영화를 끝까지 보고 나면 깜짝놀랄 반전이 숨어 있지만 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지나치는 관객들도 있다.[/footnote]가 살인을 통해 피를 공급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실수라도 하는 날엔 딸의 혹독하고 신경질적인 반응을 감내해야 하는 어찌보면 블랙코미디[footnote]아버지는 오스칼의 미래일지도 모르겠다.[/footnote] 같은 장면도 보여준다.

한편 옆집에 살고 있는 하얀 피부에 금발. 허약하고 소심해서 늘 주변으로 부터 왕따며 괴롭힘 당하기 일쑤인 오스칼이 이엘리와 더불어 영화의 주인공이다. 심약한 탓에 반친구들에게 <역겨운 돼지>라는 놀림을 당하지만 저항하거나 반격하지 못한 채 고작 상상 속에서 그들을 혼내주거나, 처단하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을 뿐이다.

둘의 조합을 통해 감독은 서로가 가지지 못한 부분을 공감하고 교감할 수 있는 관계를 자연스레 풀어낸다. 마치 두 인물이 상반된 성을 가진 캐릭터가 아니라 서로의 상상 속에 동일한 인물같은 상상을 하게 된다. 즉 오스칼의 입장에서 이엘리는 자신을 보호하고, 자신에게 해를 가하는 세력을 처단해 줄 힘, 용기, 의지를 불어 넣는 강력하고도 절대적 힘을 가진 동경의 대상이다. 아울러 평범한 인간으로 고민하고, 낮에 활동할 수 있으며, 인간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오스카는 이엘리의 희망이기도 하다. 물론 영화를 바라 보는 해석 정도에 따라 느낌과 생각이 달라질 수 있는 영화다.

왕따, 폭행, 성적 암시 등 거칠고 잔혹하고 어두운 인간의 불완전성을 조명

영화는 단순하게 뱀파이어에 얽힌 에피소드를 풀어 놓는 듯 하지만 영화 속을 들여다 보면 많은 코드가 엉켜 있다. 감독은 스웨덴이라는 공간을 표현하거나 스웨덴 사회의 모습을 투영하려는 목적은 없다고 메이킹필름에서 강조한다. 다만 영화라는 작은 공간 안에 복잡하게 생각할 거리를 많이 유도하는 느낌이다.

뱀파이어가 피를 갈구하는 이유가 욕망을 채우기 위한 폭력과 살인이 아니라 삶을 이어가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라는 설정 자체가 특이하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컬트무비 느낌이 물신 풍겨오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갈등의 구조는 이엘리보다 오히려 오스칼의 주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왕따 당하고 폭력의 대상으로서의 오스칼은 답답하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맞서서 저항하지 못하는 오스칼이 안스러울 뿐이다. 하지만 이것이 철저하게 계산된 감독의 치밀한 의도다. 이엘리를 통해서 용기를 얻게 되고, 저항의 힘을 키우게 되는 오스칼의 성장은 이를 바라는 관객의 바람을 영리하게 실현해주는 듯하면서도 서사적 구조의 인과관계를 잇는 고리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렛미인은 섬뜩한 장면의 과도한 노출없이 인간내면의 잔혹성을 상상하게 하는 공포물로 최고의 경지에 오른 영화라고 생각한다. 앞서 이야기 한바 있듯이 오스칼이 이엘리고, 이엘리가 오스칼 즉, 오스칼 내면의 폭력성이 발현되고, 결국 연쇄살인범으로 발전된다는 상상에 도달하는 순간 한 없이 잔인하고 섬뜩한 공포물이 된다.


관객 스스로 상상하게 하고,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도록 만드는데는 여러가지 상징적인 의미들과 암시가 사용된다. 이를테면 오스칼이 이엘리를  향해 초대 받지 않으면 절대 방에 들어 올 수 없냐고 되묻는 장면, 이를 무시하고 들어오는 이엘리의 얼굴이 피로 범벅이 되는 장면, 이를 보듬어 주는 오스칼의 몸짓은 해석에 따라 다양한 상상이 가능하다. 이엘리의 성적인 정체성을 모호하게 하는 장면도 이엘리가 옷을 갈아입는 장면 안에 짧게 이엘리의 하체를 비추는 카메라 워크를 통해 확인 할 수 있다.

또한 이엘리가 떠나간 방안을 거니던오스칼의 몸짓이며, 이엘리가 떠나는 창문에 가져댄 손 아래로 자욱이 남지만 이내 사라지는 장면, 마지막 가방 속에 이엘리를 숨겨 다른 마을로 향하는 오스칼의 모습 등은 관객들로 하여금 온갖 상상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시퀀스다.

이 모든 것이 의도된 연출이라는 생각이 강하다. 소년과 소녀가 만나고 애정을 나누며, 의지하고 보듬는 단순한 뱀파이어 영화가 아니라 12세 아이의 내면이 변화하고, 폭력성이 발현되는 순간을 뱀파이어라는 존재를 빌어 표현한 것 뿐이다. 이것이 관객에 따라서 한편의 서정적인 동화처럼 보일 수도 있고, 애틋하고 몽환적인 사랑이야기로 비춰질 수도 있다.

감독 스스로도 이를 유도한 듯한 뉘앙스를 인터뷰를 밝힌 바 있다. 토마스 알프레드슨 감독은 관객이 마지막 시퀀스를 통해 해피엔딩을 상상해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는 말을 전하고 있다.


<렛미인>에서의 뱀파이어는 결국 우리 자신의 모습이다. 우리가 눈에 익은 초월적인 힘. 강력한 존재로서의 뱀파이어가 아닌, 살기 위해 피를 갈구할 수 밖에 없는 본능적이고 동물적인 존재로서의 뱀파이어다. 그리고 무엇인가를 갈구하기 위해 힘들게 지나쳐온 청소년기에 한번 쯤은 존재했을 법한 우리 자신 내면의 괴물에 관한 이야기다. 상상하는 모든 것이 투영될 수 있는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이야기. 영화<렛미인>은 놀랍고 섬뜩한 우리 모두의 공포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