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6월 17일 수요일

[호타루] 패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전쟁의 역사.



우리에게 철도원으로 익숙한 후루하타 야스오 감독의 <호타루>는 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다. 호타루는 <반딧불이>를 의미한다. 죽어서도 반딧불이가 되어 고향을 찾겠노라는 젊은 군인들의 바람을 담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포스터에서 나와 있는 카피 "2년만에 다시 찾아온 눈물과 감동"은 철도원의 흥행과 감동을 어떻게든 이어가보려는 마케팅적 노림수로, 영화를 보고 나면 적지않은 어색함을 느끼게 된다. 호타루는 철저하게 승리국의 입장에서 해석된 전쟁영화와 달리 패전국의 담담함을 진지하게 담아냈다.

전쟁을 다루는 수 많은 영화나 영상에서 승리와 패자는 곧 선과 악으로 치환되곤 한다. 예컨데 조성모의 뮤직비디오 [아시나요]를 보더라도 이런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극적인 요소, 긴장감을 위해서 묘사되는 베트남군의 모습은 하나같이 험상궂고, 약탈과 폭행을 일삼는 미개인처럼 그려진다. 반대로 미군과 한국군은 정의를 수호하고, 약자를 돕는 선한 캐릭터로 그려진다. 역사가 승리한 자들의 관점에서 작성된 편파적인 기록인 것처럼 감성을 자극하기 위한 캐릭터 설정은 종종 역사적 사실 혹은 진실과는 관계없이 묘사되기도 한다.

 


호타루는 그런 측면에서 반대의 경우, 패자의 입장에서 전쟁을 바라보는 시선을 체험할 수 있다. 2차세계대전에서 패전국인 일본의 입장을 대변하듯, 일본인들의 전쟁 이후 모습들을 그린다. 목숨을 걸고 전쟁에 참여할 수 밖에 없었던 학도병의 정당성과 가미가제로 대표되는 자살특공대를 애국심으로 미화하는 방식은 마치 승자가 역사를 자랑스런 전유물로 인식하는 행위와 닮아 있어 불편하다.



하지만 헐리웃의 휘발성 강한 전쟁영화들처럼 적국이나 제 3국을 철저하게 타자화하면서까지 자국의 역사를 미화하지는 않는다. 전쟁의 승리를 위한 조선인의 징집에 대해서 미흡하나마 사죄의 의미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전범으로써의 천황의 의미를 재해석하는 대사들도 주목할만하다.. 한국인의 입장에서 불편한 진실을 자극하지 않고, 일본의 전쟁에 부득불 희생양이 될 수 밖에 없는 상황들을 연출함으로써 일본인 관객과 한국인 관객을 동시에 의식한 듯한 장면들도 눈에 띈다.

호타루에서는 의외로 반가운 얼굴도 볼 수 있다. 한국에서도 한때 청순한 이미지로 사랑을 받았던 일본출신 배우 유민이 도모코의 젊은 시절을 짧게 나마 연기한다. 일본의 국민 배우, 다카쿠라켄 역시 편안하면서도 안정적인 역활을 소화하며 영화를 더욱 빛내주고 있다.

유민

전우들과 함께 장렬히 최후를 맞이하지 않고 살아 남은 참전자, 늘 떳떳하지 못하고 짐을 지고 사는듯 가슴 한구석이 답답한 후지에와 조선인 선임병의 마지막 유서를 전하기 위해서 한국행을 자처하는 야마오카와 도모코는 전후 일본세대의 상처를 여실히 보여준다. 영원히 치유될 수 없는 전쟁의 상처보다 더욱 깊은 아픔은 결국 사람들의 마음 속에 각인된 전쟁의 허무함이 아닐까. 반전과 평화 그리고 용서라는 키워드를 적절하게 녹여냈을 뿐만 아니라 패자의 입장에서 바라본 전쟁의 의미와 일본의 슬픈 현실들이 모두 포함된 영화가 바로 호타루다.

2009년 6월 16일 화요일

[콰이강의 다리] 집착이 만들어낸 웃지 못할 해프닝.

콰이강의 다리

영화 콰이강의 다리는 1957년 작품이면서 전혀 구시대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작품이다. 2차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들과는 달리 인간의 잔혹상이나 전쟁의 상흔을 표현하는데 시간을 할애하지 않고서도, 인간내면의 변화과정을 디테일하게 담아냈다. 

영국에서 만들어지고, 영국인의 시선에서 그려져서인지 일본인(사이토대령)은 우둔하고, 비합리적으로 그려지긴 하지만 이는 영국공병대장 니콜슨 대령의 군인 정신과 리더십을 상대적으로 부각시키기 위한 배치로 생각할 수 있다.

니콜슨 대령은 철저하게 원칙주의자다. 한번 품은 의지는 절대 굽히지 않는 소신있고, 기개있는 장교로 그려진다. 일본군 수용소장 사이토에 맞서 제네바 협정상 장교의 노동금지를 주장하다가 한달간 독방신세를 지지만 절대 타협하지 않는다.



결국 의지가 승리의 결실을 이루고 장교들은 콰이강 다리건설의 관리직으로만 참여한다는 약속을 얻어낸 니콜슨 대령은 영국인의 기상과 우수함을 사이토대령에게 과시하기 위해서 급격하게 변화한다. 이적행위를 하지 않아야 할 장교가 적국의 보급로가 될 다리 건설을 주도적으로 이끌고 있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연출된다.

영화는 여기에 머물지 않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인간의 집착에 초점을 두기라도 한듯, 니콜슨 대령을 더욱 악착같은 인물로 변화시킨다. 공기 단축을 위해 환자병들까지 동원하고, 다리개통과 더불어 급파된 영국 특공대원들과 맞써서 자신의 다리(?)를 지키려하는 웃지 못할 해프닝이 벌어진다.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지?

마지막 니콜슨 대령의 자조적 한마디로 사태를 되돌리기엔 너무 늦어버렸다. 원칙을 고수하고, 당당한 리더십이 정복해야 할 대상을 굴복시키기 위해 벌이는 집착과 광기는 인간 본성의 악랄함과 어리석음을 여실히 드러내며 다리와 함께 무너져 내린다.

영화 자체가 아주 오래 되었고, 제법 긴 런닝타임에도 불구하고 지루하지 않은 것은 일본군 사이토대령과 니콜슨 대령과의 자존심 싸움이 내내 흥미진진하고, 다리가 완성되어가는 과정, 다리를 폭파하기 위해 급파된 특공대원들 사이의 스토리가 서로 이질감 없이 돌아가기 때문이다. 명작감독으로서의 저력이 새삼 놀라운 영화다.

2009년 6월 15일 월요일

[시선 1318] 10대를 바라보는 색다른 시선들.



시선 1318은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10대 청소년을 바라보는 각기 다른 관점이다. 5명의 감독이 풀어낸 이야기는 시험 스트레스 문제, 미혼모 문제, 미래에 대한 불안과 답답함, 청소년의 시각에서의 청소년 문제, 다문화 가정의 인권문제 등을 이야기한다.


[진주는 공부 중] 방은진 감독.
옴니버스 영화답게, 취향에 맞게 골라 볼 수 있는 다양성이 있다. 첫번째 단편은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자연법칙을 어릴적부터 체득하고 있는 청소년의 슬픈 단면을 가장 밝은 화면 안으로 담아낸 이야기 <진주는 공부 중>이다. 한편의 뮤지컬을 편안하게 감상하는 느낌으로, 제도권 교육안에서 진정 하늘을 날고 싶은 욕망을 억압받는 아이들의 모습이 슬프지만 화면에서 만큼은 유쾌하게 그려진다. 남지현, 정지안 두 배우의 노래와 율동도 내내 기억에 남는 영화다.


[유.앤.미] 전계수 감독
총 5편의 단편 중에서 가장 시각적으로 편안한 느낌이다. 하지만 영화 자체는 그리 안정적이지 않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 역도 이외의 다른 꿈을 상상할 수 없는 현실에 놓인 아이와 내 의지대로 현실을 살지 못하는 아이의 고민은 비단 영화 속 아이들의 고민만은 아니다.  그래서 우울하고 건조할 수 밖에 없는 물이라도 한차례 뿌려 차오르는 바다만큼의 꿈을 느끼고 싶은 아이들의 바람이 담긴 영화이기도 하다.


[릴레이] 이현승 감독
릴레이는 청소년의 임신문제를 특이한 관점에서 접근한다. 왜 학생은 아이를 키우면서 학교에 다닐 수 없느냐를 반문하는 당돌함이 보편적인 통념과 이질감을 느끼게 한다. 그럼에도 일견 그들을 보듬고 보호하기 보다는 차가운 현실로 내모는 기성세대와 사회는 우리 스스로 한번 돌아보아야한다는 자성적 메세지를 은유한다. 박보영이 등장으로 업된 기분과 문성근의 "이것이 알고 싶다"를 연상케하는 장면이 마냥 웃음으로 머물지 않은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청소년 드라마의 이해와 실제] 윤성호 감독
제목부터가 심상치 않은 영화는 5편 중 가장 색다르다. 색다름의 의미는 짜여진 각본과 가지런한 대사없이 즉흥적으로 이뤄진 비트박스와 자막 속에 잘 드러난다. 대선 벽보를 뒤로 한 화면 안에서 주저리 주저리 이뤄지는 대화는 갈피를 잡지 못할 정도로 중구난방이지만 그 속에 현실에 대한 그리고 미래의 꿈에 대한  생각이 엿보인다. 실제 10대 청소년이 직접 각본에 참여해서 만들어 나간 영화는 가장 자유발랄하고 형이상학적인 한편의 단편으로 거듭났다.


[달리는 차은] 김태용 감독
다문화 가정의 현실과 문제에 대한 진지한 접근이 돋보이는 영화다. 2005년 기준 국내 초중고 혼혈 학생은 약 6천여명, 중학교 학업 중단율이 17.5%라는 점을 놓고 보더라도 우리사회의 다문화 가정에 대한 문제는 흘려버릴 수준을 넘어섰다. 김태웅 감독은 다문화 가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소외와 외로움에 대해 감독 특유의 정서를 담아냈다. 현실을 도피하고 싶어 마냥 달리는 차은과 한국인도 필리핀인도 될 수 없는 차은 엄마는 서로 닮아있지만 외로움을 보듬어 줄 수 없는 사이다. 엄마와 딸이라는 정서적 교감이 서로를 끌어안을 때에 비로소 서로에게 평행을 달리는 마음이 열고, 서로를 끌어안은 따뜻함을 느낀다. 다문화 가정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그 속에 소외된 소수자들에 대한 한없는 따뜻함을 느끼기에 충분한 작품이다.




2009년 6월 9일 화요일

[마더] 모성애의 집착 + 섬뜩한 복수극.


모성애의 집착과 아들의 섬뜩한 복수극.


사랑이 지나치면 집착이 되고, 집착이 강해지면 비극이 된다. 비단 남여사이의 사랑에 국한되는 문제는 아니다.

한번으로 의문이 풀리길 기대한 것 자체가 무리였다. 마치 엉킨 실타레가 잡고 있는 기분이다. 그래서 또 한번 극장을 찾았다. 예상대로 곳곳에 놓치고 지나간 부분들이 스며나왔다. 하지만 수수께끼처럼 복선이 새로운 연결고리와 함께 엉켜버렸다. [오죽했으면 감독조차 이제는 말할 수 있다며 인터뷰를 한 것일까]

마더는 애초에 상상력을 제한할 의도가 없는 것처럼 세밀한 상징적 암시들이 빼곡이 들어 차있다. 모성애가 진화한 집착과 광기가 어머니라는 이름을 끝을 알수 없는 곳까지 데려 놓는다. 더불어 '복수'라는 키워드가 마치 날카로운 칼마냥 모성애의 집착, 광기와 만날 때 세상에서 가장 섬뜩한 영화가 되었다.

인상적인 장면들과 상징적 의미들.

#1 춤.
관객에 따라서 처음 김혜자의 춤은 <웃음> 아니면 <궁금증>으로 다가온다. 내 경우 첫 느낌은 웃음 쪽에 가까웠다. 깊은 의미를 두기보다 어떤 설정이나 환기차원의 배치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 후반, 그리고 종반 보기 좋게 걷어차인 느낌을 받는다. 춤은 사건이 절정으로 치닫고, 모든 진실이 어머니의 가슴에서조차 쓸어내릴 수 없는 지경에 다다를 때, 유일하게 자신을 자각하는 방법인 동시에 지우고 싶은 기억에 대한 몸짓이 된다.

#2 손.
인간 대부분의 행위는 손에서 비롯된다. 선행도 악행도 손의 힘을 빌어 이뤄진다.
날카로운 작두에 얹은 손이 위태할 때 마다 관객은 마음을 졸인다. 피가 흥건한 채로 억척스럽게 아들을 향해 돌진하는 어머니의 손은 아들을 보듬기도 하지만 결국 제어할 수 없는 광기를 뿜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영화 초반 타이틀 씬에서 김혜자가 옷깃으로 집어 넣은 손은 집착, 광기를 모두 숨기고 있는 모습처럼 보인다.(정확히 두번째 볼 때 그런 느낌이 강했다). 그래서 더욱 처량하고 한편으론 섬뜩하다. 

#3 오줌.
물가에 내어 놓은 것 마냥 늘 걱정인 아들. 담벼락에 오줌을 싸지르는 아들을 지켜보는 어머니의 시선 하나도 예사롭지 않다. 한약을 입에 넣어주고, 아들이 남긴 흔적을 뒷처리하는 모습은 모자사이의 사건들을 암시하는 것 같아 그냥 흘려버릴 수 없다.

#4 사진.
도준의 기억이 고스란이 묻어있는 한장의 사진. 가장 미스터리한 소품 중에 하나다. 기억에서 도려내고 싶은 부분이 있어서 일까. 아들만을 생각하는 모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표현이었을까. 아직까지 결론내릴 수 없는 장면 중의 하나다.

#5 꽝~복수!
두번째 관람이후 도준의 행동하나하나가 나름의 이유로 다가왔다. 벤쯔 빽미러 사건(?)이후 반복되는 도준의 대사 <꽝~ 복수>는 도준이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되찾고 복수를 꿈꾸기 시작한 터닝포인트 처럼 느껴졌다. 면회실을 사이에 두고, 기억의 끝을 잡고 있는 아들에게 내뿜는 괴성은 전기충격을 받은 듯한 전율을 느끼게 해준다.

#6 3천원
봉준호 감독은 <살인의 추억>이나 <괴물>에서 그랬던 것처럼 마더에서도 사회 언저리의 슬픈 현실을 조목조목 짚어내는 눈을 가졌다. 원조교제, 청소년 폭력, 골이 깊은 제도권의 부패들, 건조하고 때론 습하기도 한 화면 가득한 인간 군상들의 일그러진 현실이 영화 곳곳에 닿아 있다.

아무도 믿을 수 없고, 손을 내밀 수 없는 상황 속에 놓인 어머니. 형사 제문의 우산도 뿌리치고, 빗속을 걸어나간다. 빗 속에서 고물상 노인의 우산을 낚아채고 3천원을 건내지만, 정당한 댓가 이상의 2천원은 다시 어머니에게로 돌아온다. 가장 정당한 것은 빗줄기가 거세기만 한 길바닥에서의 초라한 자신뿐이다.

#7 침자리
고통을 잊게 해준다는 침자리. 보호하고 싶고, 늘 보듬고 싶은 아들 탓에 제어할 수 없는 본능을 드러내 버린 한 사람. 이젠 되려 자신의 기억을 모두 지우고 싶다. 그것이 결국 이 시대의 우리의 어머니가 아닌가라는 물음을 던져주듯 혼란스런 화면으로 영화는 끝맺음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