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5월 22일 금요일

[어톤먼트] 어톤먼트 단평.


우리말로 풀어쓰면 어톤먼트[atonement]는 속죄다.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 중에 소설을 뛰어 넘는 평을 듣는 작품은 드물다. 어톤먼트 역시 그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는 평이 다수다. 어톤먼트는 단순한 사랑에 관한 영화인듯 보이지만, 한 소녀 인생에 원죄가 되었던 사건, 세 사람의 인생을 통째로 바꾸어 버린 한토막의 사건에 대해 복잡한 시점과 시선을 보여준 영화다. 그 속에 질투와 시기, 애증과 그리움, 후회와 회한을 골고루 표현해내는데 모자람이 없는 수작이다.

영화 곳곳. 타자기 소리처럼 청각을 자극하는 요소가 인상적이다. 강약과 템포는 의미를 함축하고 그 함의에 대해 깊은 시간 사유하게끔 한다. 실질적으로 속죄의 근간은 짝사랑을 바탕으로 하는 시기와 질투에 있음을 매끄럽게 표현해낸 것 하나로도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21번째 소설 '어톤먼트'를 통해 과거로 회귀하여 속죄하고 싶은 노소설가의 소회가 처연하다. 아울러 바람과 반전이 교차하는 시퀀스는 단연 압권이다.

<세실리아[키이라나이틀리]보다 오히려 흡입력있는 연기를 보여준 시얼샤로넌>

하지만 아쉬움도 그만큼 크다. 요컨대 초반 똑부러진 연기로 주목성이 높았던 브라이오니의 소녀시절 모습과 5년의 시간이 흐르고 성장한 후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이질감은 극초반 탄탄하게 다져 놓은 캐릭터에 대한 몰입과 이해를 심각하게 방해한다. 이는 갈등과 반목 사이를 느슨하게 만들어 버리기도 한다. 소설 속의 전쟁부분과 캐릭터의 고뇌부분은 치밀한 묘사로 이루어진 원작의 일부분을 생략하여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그럼에도 원작의 일정부분을 계승하려는 노력, 나름의 향기를 충분히 만들어낸 감독의 공은 박수를 쳐주고 싶다.


2009년 5월 19일 화요일

사랑을 표현한 아름다운 영화들.

세상에 수많은 사랑이 존재한다. 복잡 다양한 감정은 인간의 이성적인 힘으로도 주체할 수 없는 소용돌이와 같다. 다양한 사랑에 대해서 나름의 정의를 내리기 위한 영화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다.


# 운명적 사랑. –러브어페어-

누구나 운명적인 사랑을 꿈꾼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 사랑은 우연에서 시작되었다가 필연으로 다가 오는 달콤한 솜사탕과도 같다. 그 달콤함을 가로막는 장벽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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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적 사랑에 관한 영화 러브어페어. 은퇴한 풋볼선수 마이크 갬브릴(워렌 비티 )과 미모의 미모의 테리 맥케이(아네트 베닝 ) 사이의 우연이 운명으로 발전하는 화면이 아름다운 영화다. 엠파이어 스테이츠 빌딩에서 기약 없는 만남을 약속한 둘은 만일 누구 하나라도 나오지 않더라도 이유를 묻지 않기로 한다. 그들의 운명적 사랑이 과연 결실을 맺을 수 있을지를 잠자코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풍요롭다.


# 미스테리한 사랑 –러브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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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년대 감성적인 스토리와 화면 구성으로 이와이순지 감독의 두터운 팬 층을 만들어준 영화 러브레터. 아픈 상처는 오직 사랑으로만 치유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영화다. 어느 날 죽은 옛 애인으로부터 답장을 받게 되는 와타나베 히로코는 과거의 사랑을 찾아가는 여정을 통해 다시금 죽은 연인 이츠카에 대한 사랑을 더욱 숙성 시킨다.

결국 미스테리한 편지의 주인공과 그를 둘러싼 또 하나의 사랑을 확인하는 히로코는 진정 자신 안에 가두어 두었던 사랑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이처럼 사랑은 영원히 풀리지 않을 미스테리한 존재와도 같다.


# 비극적인 사랑. – 로미오와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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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일약 스타덤에 올려준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은 고전에서처럼 이루어질 수 없는 비극적 사랑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사랑의 가장 큰 장애 중 하나는 당사자를 둘러싼 배경과 환경일 수 있다.


원수집안이라는 악조건 속에서 싹튼 애틋한 사랑. 달콤한 사랑 뒤에 오는 쓰디 쓴 아픔과 실연은 비록 현실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꿈에 지나지 않지만 목숨을 내 놓고서라도 숭고한 사랑으로 결실을 맺는다. Kissing you 주제곡이 더욱 애잔한 로미오와 줄리엣은 비극적 사랑의 결말이 아직 끝나지 않은 사랑이었음을  보여 준 영화다.


# 엽기적인 사랑. - 엽기적인 그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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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녀 열풍을 몰고 온 엽기적인 그녀는 유쾌하고도 발랄한 사랑의 이야기다. 전지현이 가장 전지현 다울 수 있도록 만든 영화 엽기적인 그녀는 단순히 웃고 즐겨 넘길 사랑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쉽게 사랑을 이야기하고 , 쉽게 이별을 고하는 인스턴트 사랑에 대한 따끔한 충고를 하는 듯, 진중하면서도 눈물겨운 사랑. 그리고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인 기다림을 아름답게 담아낸다. 상대방을 향하는 진실은 서로간의 아픔을 치유하는 최고의 영약이다.


# 옴니버스식 사랑 –러브액추얼리 –

세 상 사는 것이 울적해 질 때면, 나는 공항에서 재회하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보편적으로 우리는 증오와 탐욕 속에 산다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랑은 어디에나 있다. 굳이 심오하거나 특별한 것이 아니어도 어디에나 존재한다. 아버지와 아들, 엄마와 딸, 아내와 남편... 남자 친구,여자 친구, 오랜 벗...

무역 센터(Twin Towers)가 비행기 테러로 무너졌을 때, 그곳에서 휴대폰으로 사람들이 남긴 마지막 말은 증오나 복수가 아닌 모두 사랑의 메시지였다. 조금만 주위를 둘러보면 사랑은 실제로 어디에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 영화 러브액츄얼리 중에서


진 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이야기하기엔 에피소드 하나만으로 부족하다며 여러 가지 사랑을 하나의 영화에 예쁘게 담아냈다. 해바라기 짝사랑도 있고, 사회적 지위와 명성조차 무너뜨린 참사랑도 있다. 십 수년 간 희생과 배려로 동료를 사랑해온 한 늙은 가수의 매니저가 있고, 국적을 초월한 사랑도 빛을 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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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어리지만 여자친구에게 사랑을 고백하기 위해 비행장으로 열심히 달려가는 풋사랑도 인상적이다. 오랜 기간 짝사랑한 사람보다 가족의 존재를 더욱 값지게 여기는 소중한 사랑도 있다.


사랑은 복잡, 다양하지만 늘 우리 주변에서 찬란히 빛남을 가슴 깊숙이 깨닫게 해준 진정한 사랑들의 하모니 러브액츄얼리를 영원히 잊을 수 없다.


사랑을 정의 내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규정짓기엔 그 실체는 너무나 크고 다양하기 때문이다. 사계절이 바뀌듯 자연의 실체가 순환하듯 늘 그렇게 사랑도 우리주변에서 변화하고 순환한다. 늘 이런 사랑이 우리 주변에 있을 뿐이다.

페넬로피 (Penelope, 2006) 단평


아무리 다뤄도 질리거나 식상하지 않는 소재가 있다면 바로 사랑이 아닐까. 패넬로피는 동화 속의 사랑을 옮겨 놓은듯 솜사탕같이 녹아드는 영화다. 입안 가득 달콤한 향이 오래 남는다.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불운한 돼지코의 저주를 품고 태어나 25년간 부모로부터의 지나친 관심의 테두리에 갇혀 지낸 소녀의 세상 밖 사랑찾기 일탈 프로젝트 정도.


흡사 팀버튼의 영화를 연상하는 기발한 상상력과 이를 따라잡는 빠른템포의 카메라움직임은 지루함을 덜어준다. 군데군데 몽환적 화면과 어우러지는 시퀀스는 런닝타임동안 위화감 없이 눈에 익은 풍경마냥 조화롭다.

사실 영화보다도 크리스티나 리치라는 배우에 눈길이 간다. 죠니뎁과 호흡을 맞췄던 슬리피할로우에서의 신비감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외형상 흉한 배역을 소화했지만 그 속에 천진하면서도 앙탈스럽고, 당당하면서도 엉뚱한 귀여움을 끌어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후한 점수감이다.



흉물스런 외형 속에 숨겨진 실제 패넬로피의 모습을 영화내내 상상하게 만든다. 저주가 풀리고 난 후의 얼굴이 돼지코의 모습보다 더욱 낯설고 이질감이 느껴지는건 그 만큼 관객을 배역에 몰입하게끔 나름의 매력을 발산했다는 증거이기도하다.

영화자체는 미녀와 야수의 성별 역할관계를 뒤집어 놓은 정도로 다소 진부하다. 진정한 사랑은 내면에서 빛을 발한다는 통속적이고 보편적인 교훈 역시 식상하다. 그럼에도 지루하지 않고 화면을 쫓아갈 수 있는 것은 단연 머플러위로 뿜어져 나오는 크리스티나 리치 발군의 눈빛 연기때문이 아닐까.

2009년 5월 17일 일요일

[님은 먼곳에] 풀리지 않을 의문 ‘님은 먼곳에’


'님은 먼 곳'에 일단 말이 많을 것 같은 영화다. '말이 많을 것'이란 표현은 논란의 여지가 다분할 것이란 의미다. 사유를 많이 하게끔 만드는 영화를 좋아하는 관객은 오랜만에 깊이 사색하는 영화를 만나서 반가울테지만 편히 볼 수 있는 휘발성 대작들에 익숙해진 관객에겐 불친절한 영화로 비춰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 이준익감독이 만든 영화 중에서는 가장 후한 점수를 주고 싶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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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리지 않는 의문
가부장적인 시대의 여성 '순이'(수애)는 본인에게 애정이 그다지 없는 남편(엄태웅)을 군에 보내고 매달 마지못해 면회를 가야만 하는 처지다. 집안의 대를 이어야하는 중차대한 책임만을 종용하는 시어머니 때문에 더욱 어깨가 무겁기만 하다. 더군다나 남편의 마음은 순이가 아닌 여인에게 가있고, 현실의 책임마저 순이 본인이 떠안아야 하는 불운한 상황이다. 그래서 시어머니의 홀대도 참아내야 하고, 남편이 애인과의 이별로 머나먼 베트남행을 선택한 것에 대한 질책 역시 마냥 감내해야 하는 처지다. 여기까지만 이견이 없을 줄거리다.


영화는 이후부터 펼쳐지는 상황에 대한 모든 것을 철저하게 관객에게 떠넘겨 버린다. 요컨데 왜 순이는 남편을 찾아 베트남으로 향했는지 무엇이 순이로 하여금 억척스레 전장의 한가운데로 자신을 내던야했는지에 대한 명확하고 구체적인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순박한 시골처녀 순이가 위문공연밴드의 씽어 '써니'가 되어가는 과정 속에 그 어디에서도 인정받지 못했던 본인의 모습에 열광하는 군인들로 삶의 위안과 존재감을 느낄 뿐이다. 그리고 갖가지 상상을 할 수 있는 정황들만 영화 곳곳에 던져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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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영화는 매력적이다. 순이가 과연 운명적인 만남을 이룰 것인가에 대한 궁금증은 영화가 끝나면 이미 다른 의문으로 변해 있다. 앞서 주어진 정황들을 다시금 떠올리게 하고 퍼즐을 맞추듯 유추하는 재미가 바로 관객의 몫인 셈이다. 한가지 권하고 싶은 것은 꼭 주변의 여성과 영화를 보고 순이의 심리상태에 대해 함께 이야기할 시간을 가지라는 것이다.


전쟁을 바라보는 색다른 시선
이준익 감독이 상상하는 1971년의 베트남은 기존에 전쟁영화에서 그려졌던 풍경과는 다소 다르다. 전쟁 속의 참혹함, 전장의 급박하고 건조한 상황을 최대한 현실감 있게 담아낸 것은 별반 다를 것이 없지만 단순히 우군과 적군,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으로 전쟁에 참여한 대상을 양분하는 시선은 철저하게 피하고 있다. 베트콩을 바라보는 시선은 헐리웃 영화들의 반드시 때려잡아야 할 악의 대상이 아니라 전쟁의 이데올로기에 희생된 순박한 눈을 가진 동일한 인간일 뿐이다. 이를 표현하기 위해서 직접참여한 군인보다는 주변의 간접체험자가 필요했고 남성 보다는 여성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시선이 필요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순이의 눈에 담겨진 전쟁은 그래서 색다르면서도 공평하다.


영화 최고 미덕은 음악.
영화 내부적으로 또 하나의 미덕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영화음악을 꼽는다. 음악으로 시작한 영화는 음악으로 그 끝을 맺는다. 하나같이 절절이 와 닿지 않는 노래가 없다. 이준익 감독은 시사회에서 30년전에 부모님 세대들에서 유행한 좋은 음악들이 묻혀가는 것이 아쉬웠고 당시의 문화를 지금같이 즐기면서 세대간의 단절을 봉합시키고 싶은 마음에서 라디오 스타, 즐거운 인생, 님은 먼곳에 모두 70-80년대 음악을 사용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가장 축이 되는 음악은 김추자의 '님은 먼곳에'. 애잔하게 울려퍼지는 '님은 먼곳에'는 피부가 찌릿할 정도의 전율을 가져다 준다. 구슬프기도 하고 때론 공포에 젖어 있기도 한다. 한 없는 안정감을 가져다 주기도 한다. 그 밖에 순이가 부르는 노래들 '간다고 하지마오','울릉도 트위스트' , '수지큐'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는 수애라는 배우의 캐릭터를 살리는 적절한 노래들이다. 그 표정 안에 다양한 변화를 담아낸 수애의 연기를 지켜보는 것 역시 또 하나의 재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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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평
힘들게 도착한 마지막 시퀀스가 영화를 보고 꽤 오래 지난 지금까지 맴돈다. 그 만큼 여운이 깊다. 남성분들이라면 꼭 여성분과 함께 영화를 관람하기를 추천한다. 영화를 보고 난 후에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즐거울 영화다. 나머지 배우들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지만 따로 이야기하지 않아도 제 위치에서 영화를 살리는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영화를 감명 깊게 본 사람이라면 반드시 수애가 부른 '님은 먼곳에'를 인터넷에서 뒤적거릴 것이고 노래의 가사를 음미하며 영화를 다시 떠올려 볼 것이다. 오랜만에 좋은 영화 한편이 반가운 하루다.




2009년 5월 15일 금요일

[김씨 표류기] 도시에 표류하는 외로운 영혼들.


자살을 거꾸로 하면 아이러니하게도 '살자'가 아니던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것이 해방을 의미하고, 해방이 곧 구원인 사내. 그야말로 팍팍한 인생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채 빚에 쫒기고, 애인은 변심하고, 구조조정으로 거리에 내몰린 상황. 희망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다. 막장 삶을 편안히 마감하려고 한강다리 밑으로 뛰어내렸건만 정신을 차려보니 이게 왠일 밤섬이더라.


63 빌딩에서 간단히 몸을 날리는 편이 나았다라고 후회해봐도 소용이 없고, 넥타이에 목을 메달아 생을 마감하려니 살 떨리는 순간에 왠 설사냐. 생리현상 앞에서는 자살이고 뭐고, 일단 벨트부터 풀 수 밖에.

큰 볼일 중(?)에 눈 앞에 펼쳐진 사루비아는 참으로 달콤하기만하다. 이렇게 달콤함을 느껴본 적이 언제였던가를 떠올리니 아득하기만 하다. 뭔가 깨달음이라도 얻은 뒤 돌아가야할 곳을 포기한 인간 김씨의 밤섬 표류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캐스트어웨이의 톰행크스처럼 '밤섬'이라는 좁은 섬에 갇힌 한 사내의 좌충우돌 이야기를 기대하고 극장을 찾은 사람이라면, 조금 의외의 영화를 만날 수 있다. 아니 그 이상의 의미는 건질 수 있는 영화다. 그만큼 특별하다.


영화의 주요 공간은 김씨가 활약하는 작은 밤섬과 싸이질이 유일한 낙인 짜가신상녀의 어지러운 방이다.  특별할 것 없이 반복되는 무기력함이 공존하는 두 공간은 어찌보면 정처없이 표류하는 현대인의 일상적 삶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축소판 같다. 아둥바둥 뒤돌아 볼 겨를 없이 살아온 사람들이나, 인터넷 너머의 공간에 철저하게 이중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단면을 옮겨 놓은 듯하다. 그 안에 고립되고 단절되었지만 희망을 이야기하고, 진화하는 인간의 무한함, 의지와 끈기, 불굴의 몸부림을 웃음으로 풀어내는 재능이 참으로 돋보인다.

한마디로 마음편하게 그리고 속시원하게 웃을 수 있는 영화다. 엉뚱해서 유쾌하고 상상이상의 즐거움이 그득하다. 그렇다고 웃고만 있기에는 너무도 가슴 찡한 시퀀스가 몇몇 보인다. 김씨표류기의 '김씨'에게서 아는 사람의 '동치성'과 '똑바로 살자'의 정도만이 겹쳐서 떠오르기도 한다. 정말이지 정재영이 뿜어내는 웃음과 슬픔을 동시에 몰입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운 영화다.

정재영은 그렇다치더라도 정려원이야말로 새로운 발견이다. 제대로 배우가 된 듯한 모습이다.  문명 속에 고립된 외로움, 치유되지 않은 과거에 대한 두려움, 쳇바퀴처럼 반복된 무기력함에 갇혀 사는 캐릭터를 잘 소화해냈다.


현실 공간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늘 피해의식에 갇혀 사는 신상녀로서의 삶은 측은하기까지 하다. 단순히 김씨표류기가 캐스트어웨이의 오마주 수준에 머무르지 않는 것은 두가지 고독과 외로움을 링크처럼 연결하고, 치유하는 과정을 담아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현실 속에 자아와 만나는 방법, 희망을 체득하는 과정이 잔잔하다. 고립과 단절을 넘어, 디지털 차가운 텍스트의 한계를 뛰어 넘는 아날로그적 감성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이다.

여유를 갖지 못하고 한동안 웃어본 적이 없었던 사람, 내 삶 속에 편견과 오만을 버리고 싶은 사람, 희망이라는 비타민이 필요한 사람에게 꼭 추천해 주고 싶은 영화가 바로 김씨 표류기다.

1. 올해 본 영화 중 최고.

2. 영화를 보고 나서 가장 먹고 싶은 음식 짜파게티와 자장면.

3. 캐스트 어웨이가 페덱스 윌슨배구공을 PPL 했다면 김씨표류기는 오뚜기 케찹, 소니카메라, K2 배낭, HJC 헬멧 정도를 PPL하지 않았을까.... 머니머니 해도 짜파게티는 압권.

4. 영화 보고 자장면을 먹어주는 센스도 필요하겠다. 그것이 자장면에 대한 그 동안의 오만과 편견에 대한 반성이 될테니.... :)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 결핍된 가족애의 필연적 비극.

영화 시작 전 자막은 영화의 모든 것을 담아내는 메타포.

    아마도 당신은 30분간 천국에 있을 것이다.

    악마가 당신이 죽은 것을 알기 전까지는….


영화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라는 제목은 아일랜드 축사 ‘May you be in heaven a half hour Before the devil’s knows You’re dead’ 에서 유래한다. 악마가 죽음을 인식하기 30분,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지기 전까지 쾌락에 머물 수 있는 찬라의 순간을 의미한다.


80세를 넘은 시드니루멧 감독은 영화를 통해 인간이 탐할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한 욕망이 얼마나 큰 비극을 초래할 수 있는가를 너무나도 짜임새 있게 그려 놓았다.


다소 선정적인 장면(부부의 정사장면)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마약중독자면서 분식회계로 감사팀의 조사압박에 시달리는 형 앤디와 자녀의 양육비 조차 제대로 구하지 못해 아내와 딸에게 늘 당당하지 못한 동생 행크가 주축이다. 형 앤디는 회사자금을 횡령한 혐의로 의심을 받고 있는 상태고, 동생은 딸의 학비조차 챙길 수 없는 상황으로, 금전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압박이 심하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별달리 뾰족한 수를 찾지 못한 형제는 결국 범죄를 모의한다.



형 앤디는 회계감사의 압박으로 벗어날 자금을 만들어 아내와 함께 브라질로 떠날 단꿈을 젖어있고, 동생 앤디는 딸아이의 양육비를 안정적으로 제공할 수 있는 당당한 아버지의 모습을 꿈꾼다. 둘은 그렇게 작은 보석가게를 털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놀랍게도 형이 털자고 제안한 보석 가게는 다름아닌 부모님의 가게다. 다소 패륜적인 코드로 시작하는 범죄모의 설정은 영화의 비극을 암시하는 전주곡이다. 계획실행 당일 소심한 행크는 과격한 친구 바비를 끌어들이게 되는데, 계획이 틀어지는가 싶더니, 우발적인 사고로 어머니가 살해된다.


어머니인 동시에 아내를 잃게 된 앤디 가족은 거의 공황상태다. 하지만 영화는 비틀어진 사건에 머물러 있지 않고, 가족의 잔혹스런 사건이 진행되기 전 후, 약 일주일을 교차 편집으로 엮어내면서, 가족의 보이지 않았던 문제와 그 속에 내재된 갈등과 반목을 밀도있게 그린다.


처음에는 단지 우발적인 사건 속에 진행되는 해프닝과 인간심리에 초점을 맞춘 영화 정도로 생각하게 하더니 살짝 그 뒤로 얽히고 섥힌 문제들을 하나 둘 끄집어내는 식이다.꽤나 무거운 가족관계와 사회전반의 문제는 인과관계가 잘 맞물려 서로 톱니가 물린듯이 궤를 함께 한다. 연출이 세밀하고 섬짓하다. 원인들을 훑으면 훑을수록 가족간의 건조함에 숨이 턱턱막힌다.



이는 분명 한가족사의 문제만을 염두에 둔것 같지는 않다. 보편적 도덕관념과 이성적인 사고의 한계를 벗어나긴 하지만 누구나 한번쯤은 상상해봄직한 일들을 이더욱 불편한 현실로 만드는 재주가 있는 것 같다. 관객은 스스로도 충분히 위태로운 감정이입을 할 수 밖에 없다. 이것이 거장 시드니루멧 감독식 드라마의 힘이아닐까.


형 앤디와 동생행크뿐 아니라 아버지와 형의 아내의 관점에서 교차편집되는 시퀀스를 통해 건조한 가족관계와 환경 그 속에 앤디의 원초적인 욕구불만과 분열을 그려낸다. 하지만 애초에 평화롭던 가족의 한순간의 실수와 같은 사건으로 비극이 초래된 것은 아니다.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 속해 있으면서도 정작 애정을 나눌수 없었던 그래서 더욱 느슨한 관계, 불편부당한 연결고리안에 서로를 이해하고 보듬을 수 없었던 환경이 필연적으로 비극이 초래될수 밖에 없는 인과관계의 핵심이다.


결핍된 가족애와 비극.

비단 한가정의 문제가 아니라 미국자본주의의 차갑고, 어두운 가족사회를 정면으로 비추고 있는듯한 느낌이다. 부모는 보석상을 운영하며, 풍족한 삶을 영위하는 반면 큰 아들은 동생에 대한 부모의 편애를 증오하고, 우유부단하며 유약하기만 한 동생 행크는 금전적인 도움을 전혀 받지 못하고 있다. 마치 가족이 아니라 개별적인 가족 즉 세대별로 단절된 모양새다. 애정의 결핍, 서로간의 소원한 관심때문에 결국 작은 사건이 큰 비극의 단초가 되고 만다.


마약에 쩔어 있는 형, 형수와 섹스를 즐기는 동생, 아들보다 아내를 사랑하는 가장의 모습은 분명 막장스런 가족의 진수를 보여준다. 평온하던 가족이 잔혹사의 중심에 서게 된 것도 애초부터 초래될 수 밖에 없는 환경때문이 아니었을까. 결국 행크도 앤디도 행크의 아내도 모두 결핍된 가족애의 피해자인 셈이다. 그저 가족이라는 느슨한 관계의 이름으로만 명맥만 유지되는, 문제투성이의 가족관계는 서로를 더욱 폭력적으로 그리고 억압하고 단절할 수 밖에 없는 존재가 아었을까.


사건과 사건을 구성하는 과정과 결과들이 잔혹한 것이 아니라 환경을 거스를 수 없는 인간 본성의 사악함이야 말로 비극이고, 지옥인 것이다. 행크는 그 지옥에서 아마도 달콤한 30분의 찬라를 보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2009년 5월 14일 목요일

[노잉] 세상을 향해 던지는 마지막 경고.


노잉을 뒤늦게야 봤다. 이처럼 재미있고 흥미로운 영화에 대해서 왜 그렇게 말들이 많은지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들이 있었다. 노잉을 추천하는 사람들은 해프닝을 재미있게 보았다면 분명 이영화 역시 그 이상일 것이란 말을 아끼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해프닝만큼이나 긴장감과 스릴을 느끼면서 볼 수 있는 역작이라고 생각한다.


# 노잉은 단순한 재난 / 재앙영화가 아니다.

일단 노잉의 홍보 포스터에 표기된 문구부터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대부분 이 영화를 기존의 재앙이나 재난 영화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영화의 피상적인 부분만을 이해한 편협함에서 비롯된다.


노잉의 세계관은 신의 존재 여부, 좀 더 확장하면, 창조론과 진화론, 기독교적 종말론과 지적설계론을 아우르는 정신에서 시작된다. 지구상에 존재했던 수 많은 재앙들이 이미 예견된 것이었고, 이것은 단순히 초자연적이거나 우연에 기인한 현상들이 아니며, 철저하게 결정되어 있는 운명적인 미래일 뿐이라는 것이 영화 전반에 깃들어 있는 모체다.



영화 <지구가 멈추는 날>에서처럼 지구를 구하기 위해 인류 문명을 파멸시키고자 하는 메신저(외계생명)의 계획들 처럼 영화 노잉에서의 인류멸망(리셋) 역시 시차를 주고 꾸준한 경고의 메세지를 보낸다. 기독교적 세계관과 흡사한 부분이 있지만 주체가 신이 아니라 오랫동안 지구를 지켜보고 꾸준히 경고의 메세지를 보내 왔던 메신져(외계생명)라는 점에서 차별점을 가진다.


지구 멸망이 진행되고, 마지막으로 간택 당한 순수한 사람들은 새로운 정착지로 인도되고 인류를 창조한 어떤 초자연적인 힘에 의해 다시 인간본연의 원시상태로 되돌려진다. 이는 감독 스스로가 자신에게 꾸준히 되묻는 여러 가지 세계관의 질문들일 수 있다. 영화의 큰 중심이 되고 있는 존 코스틀러의 주변이야기들을 통해서 꾸준히 이야기 된다. 존은 MIT 교수로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지만 기독교적 세계간을 부정한다.


목사인 아버지와 사이도 좋지 않으며, ‘기도해준다’는 동생의 말에도 ‘하지 말라’는 거부감을 표시하기도 한다. 물론 이는 호텔 화재로 아내를 잃은 슬픔에서 비롯된 시니컬한 태도일 수 있지만 알렉스프로야스가 궁극적으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세계관의 본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부분이다. 어떻게 보면 기독교적인 가치나 믿음에 완전히 배반하는 것이어서 미국 영화 평론에서 그처럼 혹독한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 아닐까.


감독 스스로가 세상에 던지는 경고처럼 보였다. 우리가 그처럼 믿고 따르는 종교적인 신념이나 영생을 위한 기도가 실체를 뜯어보면 인간의 이기심에 면죄부를 주려는 또 다른 오만 정도일 것이라는 메세지 영화내내 지울 수 없었다. 그래서 인류 앞에 펼쳐진 수많은 재난과 재앙이 단순히 초자연적인 우연한 사고가 아니라 이를 경고하고 바로잡으려는 최소한의 메세지처럼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는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는 동시에 경고를 이해하지 못한 어리석음에 대한 결과처럼 느껴진다.


누가 복음 17장 26-35절

  1. 시대에 일이 벌어진 것과 같이, 인자의 날에도 그러할 것이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 가고 시집 가고 하였는데, 마침내 홍수가 나서,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2. 롯 시대에도 그와 같은 일이 벌어졌다.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나무를 심고 집을 짓고 하였는데,
  3. 롯이 소돔에서 떠나던 날에,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쏟아져 내려서,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4.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그러할 것이다.
  5. 그 날에 지붕 위에 있는 사람은, 자기 물건들이 집 안에 있더라도, 그것들을 꺼내려고 내려가지 말아라. 또한 들에 있는 사람도 집으로 돌아가지 말아라.
  6.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
  7.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목숨을 잃는 사람은 보존할 것이다.
  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잠자리에 누워 있을 터이나, 하나는 데려가고, 다른 하나는 버려 둘 것이다.
  9. 또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을 터이나, 하나는 데려가고, 다른 하나는 버려 둘 것이다."

<출처 : http://www.holybible.or.kr>


# 재앙의 순간에 나를 던지는 스릴이 두배가 되는 영화 노잉

인류에 대한 경고 안에 내던져진 죤에 감정이입하면 영화는 두 배의 스릴을 가져다 준다. 아비규환의 항공기 추락사고 현장, 귀가 찢어질 듯한 참혹한 지하철 사고의 주변, 죤의 옆에 내가 있다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 영화는 끔직하고, 놀라운 체험을 가져다 준다. 한층 정교하고 사실감 있는 CG는 마치 내가 현장에 있는 긴장과 스릴 사이를 오가게 만든다.



어떻게든 예정된 재앙을 막아보려는 인간의 의지가 되돌일 수 없는 한낱 시도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는 순간은 왠지 허탈감마저 밀려온다. 전 인류를 궁지로 내모는 최악의 순간에서도 약탈과 방화를 일삼는 인간의 무모함과 어리석음이 불바다와 겹쳐지면서 인류 재편(리셋)의 정당성에 상당한 설득력을 부여하고 있다.


스케일을 떠나서 실마리를 풀어나가는 사건 전개와 실체에 대한 진실들의 규명은 충분히 설득력을 가지고 긴장감을 유발한다. 앞서 이야기 한 것처럼 해프닝의 경우처럼 결말이 생뚱 맞거나 이해 가지 않는 관객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상상력, 그리고 그것에 기반한 인류 전체에 보내는 경고 메시지를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로운 영화임에 틀림없다.